
고전으로 여기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 정조시대)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철면피’라 부를 수 있을까?
허생전의 시대는 실학보다 성리학이 뿌리를 내렸다. 양반과 백성의 계급 차이, 행동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성리학을 싫어했던 실학자는 소설로 성리학을 비판했다. 오늘날 성리학이 없어지고 실학의 시대로 착각한다. 실학의 근본은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다. 지금도 엄연하게 조선의 성리학이 존재한다. 기득권(권력자)은 양반행세를 하며 국민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조선의 시대와 다르지 않은 정신착란의 패륜이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허생은 묘한 인물이다. 글만 읽는 선비다. 가난했고, 아내의 구박도 들었다. 어느 날, 그는 돌연 집을 나와 변 부자에게 돈을 꾸어 과일과 말총으로 거상이 된다. 이 대목만 보면 그는 부단한 자기 혁신가요, 시대를 앞서간 경영 천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그는 무기 거래로 전쟁을 부추기고, 외딴섬을 점령하고 도적들을 모아 ‘군왕 노릇’을 자처하며, 조선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변혁’을 말한다. 다시 돌아온 허생은 다시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이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허생은 철저히 계산된 철면피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다'라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조선 정치와 질서를 뒤집으려 한다. '명분'을 중시하는 듯하지만, 돈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현실주의자다. 허생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공정'을 내세우며 자기만의 공정으로 치닫는 정치인과 다르지 않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허생은 말을 아끼는 인물로 나온다. 정계에 진출하라는 조정의 제안을 거절하고 떠나버린다. 이 장면은 ‘고결한 은자’의 초상이라기보다는, 조선 사회에서 감당할 수 없는 자기모순의 한계를 보여주는 ‘도피’처럼 읽히기도 한다.
허생은 조선을 바꾸고자 했지만, 조선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허생 자신도 조선을 바꿀 만큼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준비 없는(철학 빈곤) 허생의 비극이며, 동시에 철면피로서의 자기 위장이다.
그러나 진짜 철면피는 따로 있다. 허생을 대하는 양반 사회 전체다. 그들은 허생의 말을 귀담아듣는 듯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개혁은 구두만으로 끝난다. 허생은 '괴짜'나 '기이한 인물'로 치부되며 다시 주변부로 밀려난다.
<허생전>은 박지원이 당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도덕성’을 풍자한 작품이다. 어쩌면 그렇게 오늘의 초상인지 모르겠다. 조선을 비판하면서도, 조선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의 이중성은 '철면피'의 얼굴로 드러난다. 겉으로는 명분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기보존 본능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진정한 개혁을 말하면서도 기득권과의 관계를 놓지 않는, 오늘날 권력자의 모습이다.
우리가 허생전을 다시 읽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두꺼운 낯짝’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얼굴을 바꾸며 살아남는다. 허생은 결국 허구가 아니다. 권력의 탈을 쓴 우리 안의 철면피들이다.
익명성의 증가.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책임질 필요 없이 막말하거나, 남을 비난하는 일이 너무 쉽다. 현실에서는 감히 하지 못할 행동도 익명 뒤에 숨으면 가능해진다.
가치의 왜곡된 기준. 성공을 정의하는 방식이 단순한 돈과 권력으로 치우치면서, 과정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위한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퍼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뻔뻔함이 오히려 유능함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엉뚱한 비유지만 거울이라는 사물의 시작은 기원전 6000년 전 튀르키예(당시 터키), 메소포타미에서 시작됐다. 거울은 나를 보는(비추는) 것이다. 당시에는 얼굴이 희미하게 비추어졌다.
19세기(1835년) 들어 독일 화학자 리비히(Lie big, 1803~1873)가 거울의 모습을 완성한다. 거울은 뻔뻔한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역설의 주장을 해본다. 실학자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은 우리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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