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기형도 시인의 유작, '잎 속의 검은 잎' 시집의 시작(詩作) 메모다. 1980년대, 시집들 판형은 활자들이 7포인트, 가난한 크기로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자연은 동사라는 말처럼 기형도 시인은 바깥으로 내모는 자연을 담은 시로 출렁거린다. 김현 평론가는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읽은 기사는 환각처럼 짧은 일단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라는 말로 해설의 첫 머리말을 시작한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아주 비장하게 기록한다. 해설에 앞서 죽음을 이리 긴 논조에 심사(深思) 깊게 기록하는 김현의 입장은 무엇인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2가의 한 극장에서 29세로 생을 내린 기형도의 죽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무라카미 하루키(1949~. 일본)의 달리기 습관은 그의 소설과 번역의 작품만큼이나 널리 알려졌다. 마치 스님이 새벽 예불을 드리듯 4시에 기상, 집필실로 향한다. 다섯 시간쯤 글을 쓰고 오후면 수영과 달리기를 한다. 그는 달리기 예찬가이기도 하다. 훗날 자신의 묘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runner),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새겨달라고 했을 정도다. 김훈 작가는 책상 앞에 '필일오(必日五)'라고 적힌 작훈(作訓)이 있다. 날마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을 쓰겠다는 다짐이다. 김훈 작가가 다섯 장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습관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이 간다. 학자들의 습관은 궁둥이에 땀띠가 나게 하자는 말도 있다. 책상과 의자를 떠나지 않는 학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에게 일정한 분량을 꾸준하게 써내는 습관은 그리 만만한 습관은 아니다. 학인은 우리나라에서 관찰과 습관의 표징 적인 분을 들라면 단연 이순신 장군이라 한다. 충무공 이순신이야말로 탁월한 견자이자 성실한 관찰자였다. 이순신 장군은 다양한 일과 전쟁을 치르면서 고뇌의 일상들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인상적인 것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간밤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깨어나셨어요. 어제 보던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래요." 시체도 깨어나게 한다는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극작가를 말하는 우스개 농담이다. 하지만 김수현도 글의 첫 문장을 위해 펜촉의 예열(豫熱)은 총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첫 문장은 작가와 독자가 처음 눈빛 교환의 순간이다. 아차 하면 드라마의 경우는 채널은 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시(詩) 창작도 그렇다. 첫 행이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떠다니는 생각과 감정을 낚아 끌지 못하면 다음 행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Miller.1899~1961)는 소설 '노인과 바다'의 도입 부분에 200번 넘게 수정한 문장을 사리처럼 빛이 나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그는 멕시코 만류(灣流)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서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이런 경우 패배에 익숙해질 만도 하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처지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의 헤밍웨이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 누구나 시련은 있는 법. '무기여 잘 있거라'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오늘도 눈이 내리 내요" 학인의 전화다. "무슨 말씀이세요. 4월인데요. 저 사는 동네, 성북동은 쾌청합니다." "아 네, 저의 마음에 눈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학인의 마음의 온도,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라는 것은 폭은 함을 상징도 하지만 매섭고 우중충한 날씨가 되기도 한다. 특히 시인들에게는 눈에 대한 인식이 트라우마인 경우도 있다. 시간은 1945년이다. 용정의 3월 초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용정역에서 2백 리나 떨어진 두만강 변의 한국 영토인 상삼봉역(上三奉驛)에는 그날따라 정갈한 농지기(혼수 婚需의 전라도방언)를 입고 나온 시골 사람이 붐볐다. 눈은 내리면서 얼어붙고 있다. 그날의 눈은 눈물을 흘리면서 휘날리는 것이다. 모두가 긴장된 모습들이다. "저기 온다, 저기." 시선들이 한곳으로 쏠렸다. 백발이 성성한 윤영석 앞으로 흰 상자 하나가 건네졌다. 차가운 시간의 공간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고인이 된 시인의 유골은 눈이 내리는 상삼봉역에 말이 없이 내린 것이다. 별의 시인, 서시의 동주는 말이 없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멈춤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절친이 몇이나 되세요?" 학인의 물음이다. 절친, 다섯 명이면 잘 산 인생이란다. 학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휴대 전화기에 저장된 숫자를 본다. 600여 명이 저장됐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절친은 아니지 않은가. 학인은 로빈 던바(Robin Dunbar·옥스퍼드대) 교수가 30년간 분석한 자료를 들어가며 말을 이어간다. 참고로 던바 교수는 '사랑에 관한 연구'와 같은 흥미로운 저서의 심리학자다. 던바 교수는 인간이 주저 없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회적 뇌'는 150명이라 한다. 150명이라는 수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공동체의 크기를 가리킨다. 피그미족이 이루는 공동체는 150명이다. 피그미족을 예로 든 것은 신체가 작은 인간이 가장 순수하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종족을 하나의 사례로 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조사한 결혼식의 하객은 평균 144명이었다. 수천만 명이 도시에 모여 살지만, 인류가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의 크기는 일정한 수준이라 설명한다. 던바 교수의 분석은 친밀이란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의 크기를 친밀함에 따라 구분이 된다. 우정의 원리라는 가설로 절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한국 시단에 영글진 시(詩)의 씨앗은 단연 이규보(1168~1241)에서 시작된다 해도 좋다. 이규보 시인 하면 술의 끝에 시가 흐르고 있다. 열한 살에 숙부가 장난삼아 시를 짓게 하면서 ‘지(紙)’자를 운(韻)으로 주었다. 옛 선비들은 시의 운을 주는 것이 보편이었다. '기나긴 종잇길에 모학사(붓)가 가고/ 술잔의 마음은 항시 국선생(누룩)에 있다.' 종이에 연상되는 것은 붓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행(行)에 술잔을 내세운 것이 섬 듯, 혀를 내두를 시성(詩聖)이 아니런가. 분명 11세의 소년으로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숙부는 물론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규보의 집안은 하인이 80여 명이라는 것을 보면 여유 있는 집안이다. 규보 시인이 11세에 술맛을 알았다는 것은 생물학적 논리로 규정하지 말자. 시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이 시인의 주량과 술을 즐긴 나이를 가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다. 이 시인이 술을 좋아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편에는 '시의 즐거움', '술의 즐거움'이 따라다녔다. 이규보는 2만 수의 시를 남겼다는 평론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유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술은 시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이태석 신부가 배추밭을 일구고, 김근태 의원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학인의 꿈 이야기다. 꿈인즉, 이태석 신부가 멀리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가난(家難)만 있고 부유(富有)가 없다. 빈부격차도 없다. 톤즈에서 주민을 위해 헌신하던 이태석 신부의 기록 영화다. '울지마 톤즈' 영상을 보다가 잠들어 꾼 꿈이 아닌가 싶다는, 부연설명에 이해가 됐다. 그런데 김근태 의원의 등장은 무엇이냐 물었다. 학인도 밋밋한 꿈이라며 피식 웃는다. 다만 이태석 신부와 김근태 의원같이 선하디선하고 소명의식이 뚜렷한 선인(善人)이 천국에서도 공동체를 만들어 김치를 밥상에 올리는 모양이라는 해석이다. 김근태 의원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군사정권하에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당했다. 후일 의원이 됐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저세상 사람이 됐다. 이태석 신부는 선교지 톤즈에서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고 교육과 의료 활동을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에서 보지 못한 두 가지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손바닥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수한 밤하늘의 별‘과 ’손만 내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투명하고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아직은 찬 바람 속의 매화가 눈을 비빈다. 한 권의 시집으로 후학의 관심을 받는 시인 김수영은 창경궁 매화를 유난히 좋아했다. 김수영 시인이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었다. 김수영 시인과 더불어 김종삼, 조병화, 박태진 시인, 소설가로 이병주, 장용학, 유주현, 김광식도 지난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작가마다 행사들이 있었다. 유독 눈여겨 보였던 행사가 김수영 시인이다. 김수영 시인은 1959년에 펴낸 <달나라의 장난> 한 권의 시집이 전부다. 그가 남긴 시는 어림, 180여 편, 산문 100여 편, 한편의 단편소설이 전부다. 그렇지만 김수영 시인은 특별한 시인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김수영 시인 관련 석·박사 논문이 330여 편에 달한다. 180수의 시, 한 권의 시집을 가진 시인에게 학문적으로 접근한 후학이 많다는 것은 어떤 특별함일까?. 그의 시에는 시의 핏줄이 선연하다. 김수영을 읽으면 첨단과 구식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김규동 시인은 "시집이 많아서 좋은 시인만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스승 김기림 시인이 시집이 3권이 전부인데 자신의 시집이 배가 더 많은 6권을 냈다며 스승에 부끄럽다 했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