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유현민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빛이 머무는 자리>(문학의 힘 刊)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일상 속에 스쳐 가는 빛과 그림자의 순간들을 따라가며, 상처와 고통의 자리에서 사랑과 위로가 피어나는 과정을 조용한 서사로 담아낸 작품집이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머무는 것'에 대한 시집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시인은 붙잡을 수 없다고 여겨온 것들- 빛, 시간, 인연, 마음-이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곧 시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이 시집에서 빛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의 끝에 남는 온기이자, 관계의 기억이며, 상처 위에 조심스레 내려앉는 위로의 은유다. 유현민은 화려한 언어 대신 낮은 음성으로 말한다. 그의 시어들은 속도를 늦추고, 독자를 기다린다. 이 느림의 미학이야말로 <빛이 머무는 자리>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시인은 "수없이 스치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만나고, 스치고, 머문다"며 "이 시집은 빛이 머무는 순간을 따라 쓴 이야기"라고 말한다.
저녁의 등불, 비 내린 창가, 고요히 머문 마음의 풍경 속에서 사랑과 그리움이 꽃으로 피어나는 장면들이 시편마다 은은한 온기로 번진다.
시집은 총 5부 80여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삶의 결을 따라 서서히 깊어지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1부 '시의 안부'에서는 시 자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제기된다. 시는 무엇을 위로할 수 있는가, 시는 어떤 방식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가. 시인은 "총 대신 시를 들고"라는 문장을 통해 시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한다. 이는 관념적 선언이 아니라, 이후 시편들에서 반복적으로 실천되는 태도다.
2부 '묵은 숨 아래서'와 3부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서는 계절과 일상이 주요한 무대가 된다. 봄비, 저녁 등불, 비 내린 창가 같은 이미지들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온기를 전달한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동반자이며, 시인은 그 속에서 인간의 고단함과 희망을 동시에 길어 올린다.
4부 '늘 처음처럼'과 5부 '둥근 사유'에 이르면 시는 한층 원숙해진다. 아버지의 뒷모습, 첫사랑의 바다, 길 위의 여정 같은 소재들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 보편적 삶의 서사로 확장된다.
특히 5부에서 드러나는 '둥근' 사유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상처와 사랑, 이별과 만남을 하나의 원으로 끌어안는다.
유현민의 시는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곁에 앉는다. 말수가 적은 사람처럼, 필요한 순간에만 말을 건넨다. 그래서 이 시집은 읽고 난 뒤보다, 덮은 뒤에 더 오래 남는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시가 여전히 위로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조용하지만 단단한 긍정으로 응답하는 시집이다.
표제시 '빛이 머무는 자리'에서 시인은 노을과 바다, 하루의 끝을 한 송이 연꽃에 비유하며 "흘러가는 것들의 따뜻한 숨이 머무는 순간"을 포착한다. 스쳐 간 시간과 인연이 가슴에서 꽃이 되는 순간을 붙드는 이 시는 이번 시집의 미학을 응축해 보여준다.
노을은 바다의 어깨에 내려앉아
붉은 물빛으로 번져
세상을 적신다
자갈이 저무는 하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바다는 그 속삭임 따라
파도의 옷자락을 끌어당긴다
멀어지는 빛을
다시 품는 반복의 순간
하루의 끝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다
시간의 흐름 속에
노을은 더욱 깊은 색으로 내려앉고
흘러가는 것들의 따뜻한 숨이 머문다
잠시 머문 자리에서
머물다 가는 빛의 이름으로
소중한 이름 하나 불러본다
- 표제시 '빛이 머무는 자리' 전문
반복과 귀환의 서정
유현민 시인의 표제시 '빛이 머무는 자리'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중심축이다. 이 시에서 노을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하루라는 시간의 감정적 종착지다.
"노을은 바다의 어깨에 내려앉아 / 붉은 물빛으로 번져"라는 구절에서 빛은 내려앉고, 번지며, 머문다. 이는 빛을 움직이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담는 존재로 전환시키는 시적 장치다.
시인은 '저무는 하루의 이야기'를 자갈에 맡기고, 바다는 그 속삭임을 파도의 움직임으로 응답하게 한다. 이 장면은 세계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유기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인간의 감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마음속에서 파문처럼 반복되며 되돌아온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반복의 순간"이다. "멀어지는 빛을 / 다시 품는 반복의 순간"은 하루가 끝나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잔여를 가리킨다.
끝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피어남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하루의 끝은 "한 송이 연꽃"으로 형상화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듯, 시간의 침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머물다 가는 빛의 이름으로 / 소중한 이름 하나 불러본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름'은 특정한 대상이기보다, 기억하고 싶은 존재, 혹은 지켜내고 싶은 관계의 총칭이다.
시는 그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불러 남긴다. 이것이 바로 유현민 시가 선택한 방식의 위로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결국 묻는다. 우리가 붙잡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정말 사라졌는가. 아니면, 우리가 잠시 머물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을 뿐인가. 이 질문은 시집 전체를 감싸며, 독자에게도 자신의 ‘빛이 머무는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조명제 시인·문학평론가는 추천사에서 "유현민의 시는 고통과 상처가 머무는 자리에 사랑과 위로의 언어를 심는다"며 "어머니의 낡은 행주와 아버지의 무뚝뚝한 뒷모습 같은 일상의 장면을 통해 가족애의 근원적 온기를 보듬는다"고 평했다.
이어 “타인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벽을 허물고 여백을 남기려는 시적 태도가 인상적”이라며 이 시집에 "함께 앉기를 권한다"고 덧붙였다.
해설 '바람과 햇살, 그리움이 피워낸 고요의 들꽃'에서 조명제 평론가는 유현민 시를 "위로와 평화라는 시적 담론의 한 결정(結晶)"이라 규정한다.
"시는 상처 난 말들을 조금씩 싸매어 서로를 보듬는 언어이며, 어둠 없는 밝고 화평한 세상을 꿈꾸게 하는 힘"이라는 해석은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유현민 시인은 충남 당진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1995년 <흙빛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용운 신인문학상(2022), <시현실> 신인상(2024)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첫시집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시와 시낭송을 통해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언어"로서의 시의 가능성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한국시인협회, 충남시인협회, 충남문인협회, 시현실문학회, 흙빛문학회, 서산시인회, 윤곤강문학기념사업회, 한국시낭송가협회에서 활동 중이다.
<빛이 머무는 자리>는 빠른 위로보다 오래 남는 온기를 선택한 시집이다. 한겨울의 추위를 누그러뜨리는 등불처럼, 이 시집은 독자의 가슴 한켠에 조용히 머물며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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