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하는 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비겁자들이다.
양심을 져버린 무리들이다.
그들을 땅속 깊이 묻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민주투사들은 여전히 깨어 있다.
민주주의라는 불씨를 가슴에 품고 쓰러져 간 이들의 눈물은 비가 되어 땅을 적신다.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싸웠던 이들.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 진실을 깊이 묻어버린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진정한 이름을 듣지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소외를 겪던 도시에서, 11공수여단의 유혈 진압은 비극의 서막이 되었다. 계엄군은 상가와 학원에 난입해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젊은이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대검으로 찔렀다. 마침내 시민들은 참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거리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광주는 전쟁터였다.
거리엔 부상자가 속출했고, 헌혈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도청 옥상에는 검은 리본과 반기가 걸렸다. 성직자와 시민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나 계엄군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모든 통신을 차단했고, 헬기로 유인물을 살포하며 상황을 왜곡했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고 영정 사진을 들고 서 있는 다섯 살 아이. 그 눈물에 외신은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 일부 국민들은 광주를 '무장 폭도'로 매도했다. 철문으로 봉쇄된 채 고립된 도시, 외부와 단절된 그곳에서 피 흘린 이들의 이야기는 왜곡되거나 묻혔다.

우리는 아직도 듣지 못했다.
5·18은 불의와 독재에 맞선 위대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그것이 위협이었다. 민주화의 외침 앞에 침묵했던 이들, 자유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 독재에 대한 향수에 젖은 이들. 미성숙한 자아가 따르는 명령과 위계는 곧 폭력에 대한 동경이다. 그들이 독재를 부른다.
과거에 대한 애착인가, 기득권 유지에 대한 욕망인가. 민주화에 대한 두려움은 진실 앞에서의 자기보호일 뿐이다.
5·18 국립묘지에 잠든 투사들의 함성은 지금도 비석에 새겨져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지금 어떤 자유를 살고 있는가."
민주와 자유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의 책임이며, 내일의 질서다. 우리가 1980년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고양이는 은혜를 갚는 동물이라 한다.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져다준다. 생명을 존중하는 윤리적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민주화의 희생자들을 이념의 적으로 낙인찍는 이들을 본다. 그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선물을 받고 등을 돌린 자들이다.
윤리마저 등진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어쩌면 그것 또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식일지 모른다. 그들이 꺾은 오월의 꽃은 결코 지지 않는다.
어릴 적 주입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념처럼 믿고 사는 자들에게는 자유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무지와 뻔뻔함 속에서도 흔들릴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으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는, 인간을 향한 사랑을 품은 체제이다.
그렇기에 따뜻한 품을 지닌 여성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전선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독재는 가부장제와 닮아 있다. 여성들이 독재에 맞설 때, 이 나라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여성은 결코 뒤편에 서지 않았다. 자유를 외치며, 깃발을 들고 가장 앞에 섰다.
여성들이여, 독재자의 말에 길을 잃지 말라.
5·18의 민주 여성 투사들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

현재 (사)한국문인협회,(사)국제PEN한국본부,(사)한국현대시인협회, 국제계관시인연합 한국본부(UPLI-KC)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울림>과 <문학의 뜨락> 등 동인지에 작품을 기고하고 있다. 세종여성플라자 새봄기자단과 뉴스피치 시민기자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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