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소설가의 유언은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니라, 삶과 문학, 그리고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된다. 몇몇 대표적인 문인들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 그들의 사유 담긴 의미를 되새겨본다.
천재적 시인 이상(1910~1937)은 결핵으로 요절했다. 일본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마지막 순간 "이제 가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단순한 죽음의 예고가 아니라, 그가 평생을 살아오며 실험적 문학을 탐구했던 삶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문학적 혁신가였고, 그의 죽음마저도 새로운 문학 세계로 떠나는 여정처럼 보인다.
이상의 실질적인 유언은 부인 변동임 무릎이었다. 시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변동림은 도쿄로 갔다. 부인의 무릎에서 이상은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국인의 가슴을 울리는 시인 김소월(1902~1934)은 우울증과 시대적 절망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으로 전해지는 "아, 어머니!"라는 말은 그가 평생 그리워했던 모성을 떠올리게 한다.
소월의 시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서는 '그리움'과 '상실'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부른 것은, 그의 문학이 끝내 지향했던 사랑과 위안의 상징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는 생의 마지막 순간, "모두 부질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삶의 허무를 담은 이 짧은 한마디는, 거대한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인간의 운명을 깊이 성찰했던 작가의 세계관이 함축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절대 부질없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문학은 한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
소설 '소나기'로 널리 알려진 황순원(1915~2000)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한국 문학계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떠났다.
그의 작품 속에서도 인간적인 따뜻함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던 만큼,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행복을 말하며 생을 마감했다.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이자 서시로 유명한 윤동주(1917~1945)는 옥중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정확히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을 대표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구절이 그의 유언과 다름없다고 평가된다.
그는 억압된 시대 속에서도 시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희망을 노래했고, 그의 정신은 여전히 한국 문학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권일송(1933~1995) 시인은 별이 되기 전 부인과 아들이 모인 곳에서 "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라는 말을 했다. 가족은 시인을 서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으로 모셨다. 삼 일 후 시인은 별의 나라에 갔다. 죽음 앞에서 본능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별밭의 시인, 최은하 시인은 평소 "어머니 곁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어"라는 말을 곧잘 하였다. 고독한 공간을 선택한 최은하 시인은 마지막 시간을 병실에서 면회객을 일절 사절했다.
시인의 유언으로 남긴 말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평소 "어머니 곁으로 갈 날이 많지 않다"는 말이 유언이 아닌가 싶다.
문학은 삶의 기록이며, 작가들의 마지막 말은 그들이 남긴 문학적 유산과 연결된다. 이상은 모험과 실험을 향한 열망을, 김소월은 그리움과 정서를, 박경리는 역사적 성찰을, 황순원은 따뜻한 삶을, 윤동주는 시대를 향한 저항과 꿈을 담았다. 권일송은 높은 곳을 지향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였다. 별밭 시인은 어머니 품을 그렸다
그들의 유언은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곱씹어야 할 문학적 메시지이다. 문학이란 결국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예술이기에, 우리는 그들의 마지막 말을 통해 다시금 삶과 문학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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