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종잇길에 모학사(붓)가 가고/ 술잔의 마음은 항시 국선생(누룩)에 있다.'
종이에 연상되는 것은 붓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행(行)에 술잔을 내세운 것이 섬 듯, 혀를 내두를 시성(詩聖)이 아니런가. 분명 11세의 소년으로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숙부는 물론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규보의 집안은 하인이 80여 명이라는 것을 보면 여유 있는 집안이다. 규보 시인이 11세에 술맛을 알았다는 것은 생물학적 논리로 규정하지 말자. 시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이 시인의 주량과 술을 즐긴 나이를 가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다. 이 시인이 술을 좋아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편에는 '시의 즐거움', '술의 즐거움'이 따라다녔다.
이규보는 2만 수의 시를 남겼다는 평론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유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술은 시가 되어 훨훨 나는데,/ 여기 미인의 넋, 꽃이 있다./ 오늘은 이 둘이 쌍쌍 하니/귀인과 함께 하늘에 오름과 같도다.//'
그가 남긴 시 한 토막이다. 술을 좋아하는 자는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라는데 이규보 시인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73세의 장수를 누렸지만, 여성 편력의 이야긴 한 줄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이규보 시인은 시대상으로 보면 상당히 선진적 철학을 가졌다. 이규보는 무당에 점치는 것을 비판했다. 무당을 칭하며 '구멍 속에 사는 천년 묵은 쥐'라거나 '숲속에 사는 구미호'라는 증오의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무당을 가까이하는 선비와 정치인들에게는 노골적 적개심도 드러냈다.
무당을 들어 "삶과 죽음, 재앙과 복을 자기들 마음대로 추측하는가 하면 그 능력을 믿고 사람에게 끝없이 먹을 것을(재물) 끌어모으고 의복을 빼앗는다. 만약 내게 서슬이 퍼런 칼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고 싶으나 법이 있어 그러지 못할 뿐이다."
시대상으로 무당이 판을 치는 세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 숭배요, 효의 도리로 여겼던 시절이다. 이규보 시인은 제사마저도 부정하는 앞선 사고의 태도를 보였으니 가히 선각 선비정신이 아닌가.
당시는 '암탉이 우는 것은 집안이 망하거나 사람이 죽게 될 징조'라고 생각했다. '까마귀가 우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 여겼다. 심지어 '사람이 죽기 전에 시루가 저절로 깨진다'는 얘기도 있었던 시절이다. 이규보 시인은 이 같은 말들을 자신의 집의 일을 예로 들며 일깨워주었다.
"시루가 깨지는 것은 불이 뜨거워서 그럴 수 있다. 물기가 없어서 깨질 수 있다. 우리 집에서 시루가 쩍하고 갈라졌어도 우리 집안에 누구도 죽지 않았다."
이규보는 사람이 죽은 뒤 막대한 재산을 낭비하며 장례와 제사를 지내는 것도 지적했다. 살아생전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제사보다 옳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규보는 시대의 통치자들은 봉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목적적 신학과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참위설, 풍수지리설 등 미신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규보는 천마산 등지에서 은거하며 독서를 즐겼다.
1202년에 남쪽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규보는 이때 농민 봉기를 수습하는 관군의 위치에 있었다. 만 1년 3개월을 동안 반란의 평정에 공도 세웠다. 이규보는 농민의 실상을 알게 되고 이를 조정에 알려 농민을 위한 선정을 하게 했다. 하지만 간신배들로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자연 과학의 수준에서 갖가지 관념적 사상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규보는 '술'과 '문학'과 '정치', 이 셋을 가장 잘 조화 시킨 쾌남 선비였다. 눈은 맑고 구슬처럼 빛이 났다. 살결은 희고 키는 후리후리하여 늠름했다. 뭇 사람 속에서 눈에 띄는 사나이,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사람이었다. 서거정(1420~1488)은 "동방의 시호(詩豪)는 규보 한 사람 뿐"이라 했다. 그를 가리켜 주호(酒豪), 광객(狂客), 오연(傲然)이라는 기질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시는 대하(大河)같이 흐른다. 그의 시에는 술의 매혹, 술의 시학이 잔잔하게 흐른다. 오 술의 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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