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설차(雀舌茶) - 고형숙(1960~ )
창밖으로 내리는 곡우(穀雨)와 마주하고
연리지(連理枝) 같은 참새의 푸른 혀를 닮은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여린 햇빛 아래
홀로 고운 매화꽃 점점이 피워
맑은 향기 품어내던 그 골짜기
매운 춘설(春雪) 견뎌 온
갓 트인 연초록 여린 찻잎
덖고 비비고 덖고 비비고
또 덖어 비비고 말린
서러울 것 같은 청순한 영혼
그 정성 그대로
점점이 설중매(雪中梅) 수(繡) 놓은
하얀 다포 깔아
좋은 물 끓여내어
찻잔을 데우고
찻잎에 물 부어 곱게 우려
살포시 한 모금 목에 넘기니
병마에 찌든 가녀린 영혼,
내 눈가에서
내 혀끝에서
맑은 찻잔 속에서
푸르게 푸르게 운다.
솔솔 찻물 끓는 소리에 마음이 빈틈없이 덥혀지는 깊은 밤이다. 지난 해 곡우 이틀 전, 지리산에서 채엽한 여린 찻잎으로 직접 정성스럽게 제다한 작설차를 마시는 서정은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도 시리도록 투명하기만 하다.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었다는 소설 첫 구절이 생각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정성으로 직접 제다해 더욱 소중해 늘 곁에 두고 싶은 차(茶)이기도 하다.
다선일미(다茶禪一味), 차의 맛은 곧 선(禪)의 맛이라고 했다. 몸을 단련하고 스스로 가진 실력을 연마하는 것은 매일 실천을 요구하기도 하다. 다만 마음을 다스리고 진리를 찾는 데에는 홀로 차를 마시는 것이 시작이 아닐까?
제주에서 귀향을 살면서 차 나무를 직접 가꾸고 홀로 그 찻잎을 우려 마셨던 추사 김정희 선생은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깨달음을 준다고 하였다. 한 잔의 차로 마음을 밝히는 일, 차와 수행은 곁에 있으며 서로를 보완한다고 하였다.
마침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入春)과 함께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만히 찻물이 끓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어느새 우주에 혼자 남아있는 듯 선정에 들게 된다. 따뜻하게 우려낸 찻물을 마음에 상감하는 시간, 지금 홀로 마시는 차는 그토록 탈속했고 맑았다.
옛 차인들은 차를 마시며 차에 대하여 이렇게 찬미하기도 했다.
차를 끓이니
소리는 솔바람 같고
거품은 게눈 같다.
한 잔 마시면
온 몸의 모든 신경이
잠에서 깨는 듯하고
천만 가지 근심이
가슴에서 씻기는 것 같다.
이것이 비로소 차 맛의
지극한 경계다.
마음자리를 밝히는 차의 길, 봄이 오는 길목에서 끽다거, 차 한 잔 마셔보자.<장건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