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얼핏 보기에는 무관해 보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에서 비극의 핵심 요소로 카타르시스(비참한 운명을 보고 간접 경험)를 강조합니다.
이는 관객이 연민과 공포를 경험함으로 감정 정화를 이루는 과정을 연결한다는 이론입니다. '서른 즈음에' 노래는 이와 유사한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노래는 청자(듣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과 청춘의 상실을 세포들에 전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꺼내 보입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머물러 있는/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랫말 전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란 비극, 보편적인 인간 조건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각적인 철학자입니다. '서른 즈음에'는 나이 듦과 시간의 흐름이라는 모든 인간이 겪는 주제가 고봉(高捧)으로 담겼습니다. 노래는 특정 세대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너와 나라는 공동체에 공감을 얻습니다.
비극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시한 플롯(plot)의 구조는 '서른 즈음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플롯은 이야기나 우화에서 볼 수 있는 서술구조보다 매우 수준 높은 서술구조를 띠게 됩니다. 노래는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변화를 그리며, 청춘의 상실이라는 '발견'을 그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극단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중간적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른 즈음에'의 화자 역시 영웅도 악인도 아닌, 평범한 삶을 사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서른 즈음에'의 노랫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시적 여러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노래가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비극이 가진 보편적 감동의 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대, 장르를 넘어 인간의 감정을 울리는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성의 요체는 주관적으로 하마르티아(hamartia, 불가피한 잘못)입니다. '서른 즈음에'에서 화자는 청춘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즉 일종의 하마르티아를 말하려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eleos)과 공포(phobos)를 환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른 즈음에'서도 청춘의 상실에 대한 연민과 미래에 대한 하마르티아를 내포합니다.
이러한 공통점들을 통해, ‘서른 즈음에’가 현실적이고 보편의 노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의 여러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신학을 같은 선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는 철학 앞에 걸어간다고 정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비극론과 음유시인 김광석의 노래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는 예민한 성감대를 이룹니다. 비극이란 표현할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예술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청자의 논리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그 작품 안에서 표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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