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학인의 마음의 온도,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라는 것은 폭은 함을 상징도 하지만 매섭고 우중충한 날씨가 되기도 한다.
특히 시인들에게는 눈에 대한 인식이 트라우마인 경우도 있다. 시간은 1945년이다. 용정의 3월 초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용정역에서 2백 리나 떨어진 두만강 변의 한국 영토인 상삼봉역(上三奉驛)에는 그날따라 정갈한 농지기(혼수 婚需의 전라도방언)를 입고 나온 시골 사람이 붐볐다.
눈은 내리면서 얼어붙고 있다. 그날의 눈은 눈물을 흘리면서 휘날리는 것이다. 모두가 긴장된 모습들이다.
"저기 온다, 저기." 시선들이 한곳으로 쏠렸다. 백발이 성성한 윤영석 앞으로 흰 상자 하나가 건네졌다. 차가운 시간의 공간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고인이 된 시인의 유골은 눈이 내리는 상삼봉역에 말이 없이 내린 것이다. 별의 시인, 서시의 동주는 말이 없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멈춤의 침묵 속에 진행이 되고 있었다. 별과 노래한 시인에게 별들은 하얀 눈을 보내고 있다. 눈이 만가(輓歌)의 노래를 부른다. 이런 시간을 두고 납덩이가 무겁게 내려앉는다고 할까.
다시 유해는 아버지 품에서 아우 일주에게 옮겨졌다. 같은 교회를 나가던 교우들은 침묵으로 긴 행렬로 무겁게 발걸음을 딛는다. 김정구(1916~1998. 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래처럼 한 많은 두만강은 늘 한의 강 이려는가.
별의 시인은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 고향에 돌아왔다. 유골을 봉송하는 고향의 교우(敎友)들은, 뱀 꼬리 마냥 긴 행렬이다.
너무나 슬픔이 크면 눈물도 마르는 법. 조촐한 가족장이다. 집이며 교회의 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이다. 윤 시인의 집과 교회는 나란히 붙어있어 갖은 마당을 쓴다.
아버지 일가친척과 교회의 집사, 장로, 지도자와 유지들이 모여들었다. 조촐하고 무거운 장례식이다. '자화상(自畵像)'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연전(延專) 졸업 무렵, 교내 잡지 문우(文友)에 발표된 작품이다.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의사와 같은 직업을 원했다. 그렇지만 시인은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시인의 물음에 답하고 말하고 싶다 했다.
영혼은 몸속에 살고 있는 영원불멸의 생명 원칙이다. 문화와 기억, 상상력은 정신에 속하는 것이다. 과학과 철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인문학에 말하고 있다. 인문학 속에서도 해결이 되지 못한 것을 시가 말하려 한다.
할아버지와 가족은 윤동주 시인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런 가운데 굳은 결심으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런데 차가운 장송(葬送)의 노래를 가지고 귀국을 했다. 그 시인의 조부 윤하현과 부친 윤영석의 심정에 대하여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들을 생각하면 학인처럼 마음에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제자를 먼저 보낸 어느 교수는 장송사(葬送辭)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는 처음에 나의 제자였었고, 다음에 나의 친구였으며 나중엔 나의 스승이었다."
비록 손자요 자식이지만, 대의(大儀)에 순(殉)하고 높은 시혼(詩魂)에 불탔던 그의 죽음에 가치 부여는 어른들이 더 정중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이는 해사(海史) 김석관(金錫觀)이다. 순 한문으로 300자 정도의 비문이다. 조롱(鳥籠)에 갇힌 새가 때를 못 만났다는 내용이 새겨졌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옥사의 내력이 고스란히 엮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지는 용정 동산이다. 지금도 별은 빛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다가 시인의 추억은 겨레의 생명이고 등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청청히 벚꽃은 피고 있는데, 마음에 눈이 내린다는 학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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