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작 <백사마을>(청어출판사)은 이윤선 시인이 35년간 마을 현장을 드나들며 고스란히 담은 시집이자 사진집이며, 일종의 '도시기록문학'이다.
총 496쪽에 양장본으로 제작된 이 책에는 72편의 시와 380여 장의 칼라 사진이 실려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수령 100년, 150년을 버텨온 느티나무와 음나무을 비롯, 깨진 창문, 정감 어린 좁은 골목, 고무다라이, 오래된 사랑방, 병든 고양이들까지 모든 것은 시인의 펜 끝과 카메라를 통해 마을의 낡고 소박한 풍경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존재 가치를 시로 되살려 놓고 있디.
1967년 청계천, 영등포, 용산 등지에서 강제 철거된 이들을 위한 이주지로 시작된 백사마을은 한때 1,200가구가 넘게 모여 살던 삶터였다. 그러나 도시개발의 그늘 아래 '주거지 보전사업'마저 좌초되면서, 오랜 세월 낙후된 채로 방치되었다가 결국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특히 이 시집 <백사마을>에 수록된 이윤선 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시는 '수문장'이다. '수문장'은 지난 세기의 가난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사마을을 지켜온 생명의 존재로서,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기억과 공동체의 상징으로 시에 등장한다.

수문장
- 이윤선 시인
백사마을 초입 우측에
수령 100년이 넘은 우듬지가
아름답고 늠름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왼쪽에는 수령 150년이 넘은 음나무가
떡버티고 서 있다
마을을 수호해 준 두 거목
수문장이 되어 굳건히 버티어 준 104번지
생채기를 안고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듬고
요령잡이를 앞세운 상여를 배응했을
슬픔과 기쁨을 같이한 마을의 오랜 역사
가난과 한이 서린 달동네
삶과 죽음이 맞물려 돌아가던 달동네
크고 작은 흥망성쇠에 웃고 울었을 그늘
그 삶을 한결같이 응원했을 두 거목
모진 비바람과 태풍 앞에 맨몸으로 서서
그들이 떠나버렸어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과 염원
기도와 독백을 주렁주렁 들고
지나가는 또 다른 이들을 위해
오늘도 지켜주고 싶어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
이 시는 도시의 개발 이면에 가려진 서민 삶의 기억을 문학으로 기록하려는 시인의 집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이윤선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의 의미를 백사마을이라는 공간의 역사성과 함께 살려내며, 재개발로 사라질 이 마을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있다.
시의 첫 연은 느티나무와 음나무의 '수령'과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며 시작된다. 이는 단순한 정경 묘사를 넘어, 이 나무들이 어떤 시간의 축적 속에 존재해왔는지를 말한다. 특히 '늠름하게 서 있다'와 '묵직하게 버티고 서 있다'는 표현은 나무가 지닌 생명의 의지이자 수호자로서의 위엄을 부여한다.
이어서 시인은 두 나무를 '수문장'이라 명명하며,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의인화된 존재로 확장시킨다. 수문장은 고대 성문을 지키던 병사이며, 마을의 입구를 지킨다는 점에서 나무는 상징적 경계의 존재로 해석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이자, 내부의 역사와 기억을 외면하지 않는 존재다.
시 중반부에서는 나무들이 경험했을 마을의 슬픔과 기쁨, 생과 사의 교차가 시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요령잡이를 앞세운 상여를 배웅했을' 장면은 단순한 장례 묘사가 아닌, 공동체의 죽음을 함께했음을 암시하며, 이 나무들이 단순히 풍경 속의 배경이 아니라 백사마을 서사의 주체임을 부각시킨다.
끝으로, '모진 비바람과 태풍 앞에서도 맨몸으로 버텨내며', '소원과 염원, 기도와 독백을 주렁주렁 매달'’ 서 있다는 구절은, 이 나무들이 단순히 버텨온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인간의 감정과 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의 시학'이기도 하다.
'수문장'은 그 자체로 백사마을의 역사이자, 사라질 삶에 대한 애틋한 인사다. 동시에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지는 도시의 기억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이윤선 시인은 시집 <백사마을>을 통해, 사진과 시를 병치함으로써 도시기록문학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선보이고 있다.
그 속에서 '수문장'은 마치 도시의 현관문을 지키는 시적 비문처럼,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선 나무들을 통해 우리 모두의 '잊고 살았던 근대'를 되묻는다.
이윤선 시인은 이 시집의 머리말에서 "백사마을을 들락거린 지 벌써 35년이 되었다"며 "그곳은 나의 유년의 한 장면 같았다. 아이들의 손에 사탕을 쥐여주며 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듯 머물렀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그동안 이 마을의 삶을 글로 쓰는 것조차 죄스럽고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지옥 같은 현실을 문장으로 다시 확인 사살하는 것 같았다"고 말하며, 조심스럽고 절제된 태도로 마을을 기록해왔다. 폐허가 된 후에야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그들이 놓고 간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고 밝힌다.
이 시인은 그러면서 "페허와 병든 고양이들만 득실거린 '백사마을'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남겨놓는 작업을 기꺼이 하기로 마음먹었다"라며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는 없을지라도 소시민들이 살다간 흔적을 어설프게나마 남긴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었다. 겉 수박만 핥는다 해도 나는 이 작업을 통해 그들의 족적을 대신 남긴다"고 덧붙였다.
최창일 시인(이미지문화평론가)은 이 책 해설에서 "이윤선 시인의 표일(飄逸)한 시와 사진이 만나는 시사는 가슴 시린 언어의 영상"이라며 "죽은 씨앗도 살려내는 시인의 시어는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고 평했다.
최창일 시인은 이어 "이 시인의 없어지는 것들에 안타까움을 다스리는 시선이 신능(神能)자의 경지다"라며 "이번 '백사마을'은 삶의 본질들 안으로 다가서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 시인은 그러면서 "더 이상의 따뜻한 공감의 시선은 없다"라며 "이 시인의 시와 사진은 씨앗을 나누어 주는 시묘상(詩苗商)의 주인으로, 병든 고양이, 깔끄막 겨울, 지붕을 누르는 폐타이어를 보는 존재의 시어들, 오늘을 사는 독자의 귀를 세우게 한다"라고 덧붙였다.

시집으로 <첼로가 갇힌 방>, <인간, 그 쓴이름으로 오고 가지 말자>, <저 바보가 나를 사랑이라 한다>, <낙엽 한 장의 시비>, <절룩이는 풍광 그리고 삶과 나>, <비익조>, <시인, 벼랑 끝에서도 노래했다>, <울음꽃>, <밥 빚과 동행 빚>, <통장 보고서>, <이윤선의 밥살이>, <그렁그렁>, <산>, <니가 풀을 이기니?>, <광릉숲 단상>, <백사마을> 등 다수의 시집과 동화 <개똥밭>, <별사탕>, <업이 언니>과 서한집 <무궁화병에게>, 자서전 <뜨거운 가족> 등을 펴냈다.
<백사마을>은 이윤선 시인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며, 도시와 기억, 서민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단지 철거된 마을의 흔적이 아닌, '잊고 살았던 근대의 시간'을 되살리는 비문으로, 단순한 재개발 지역의 기록을 넘어, 삶의 흔적과 기억을 품은 시적 공간의 귀한 사료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수문장처럼 <백사마을>은 이제 우리 기억의 입구를 지키는 시적 아카이브(Archive)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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