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던 중 충남 보령시와는 2000년부터 교류를 시작하였는데, 보령시는 국내 제일의 해수욕장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 시내에 대학을 가진 교육 도시 등 후지사와시와 유사점이 많다.
또 2002년에는 '한·일 교류의 해'였던 것과 동시에 세계 축제인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를 한·일 공동개최 하는 역사적 대성공을 거둔 해 이기도 하며, 특히 2002년 11월 15일에 후지사와시·보령시가 자매도시를 맺게 된 것은 대단히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한일 양국은 본래 문화 등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므로 두 시가 서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넓혀 나가야 하겠다.




이 비(碑)에는 신라 말엽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개산조(開山祖)인 대낭혜화상 무염국사(無染國師)의 생애가 5,120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글은 신라 말의 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찬술하였으며, 글씨는 역시 신라 말의 유명한 문장가 삼최(三崔) 가운데 한 사람인 최인연이 구양순체로 썼다.
무염국사가 입적한 지 2년 뒤인 진성여왕 4년(890)에 사리탑을 건립할 당시 탑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염국사는 법호가 무염이고 속성은 김씨이다.
태종 무열왕이 그의 8대조가 된다. 신라 애장왕 원년(800)에 태어나 진성여왕 2년(888)에 입적하였다. 13세에 출가하여 설악산 오색석사의 법성선사에게 선을 배우고, 이어 부석사의 석등대덕에게 화엄경을 공부했다.
헌덕왕 14년(822)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다시 화엄을 배웠으나 곧 마곡사의 보철화상(寶徹和尙)의 문하에 들어가 선을 물어 인가(印可)를 받았다.
보철선사가 입적한 뒤 사방의 고적과 고승대덕을 찾아보고 오랫동안 고행을 닦아 동방대보살이라고 불려졌다.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대신 김흔의 간청으로 웅천의 오합사에 주석(駐錫)하니 법문(法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선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문성왕은 절의 이름을 성주선원(聖住禪院)이라 개칭하고 편액을 내렸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무염선사를 국사로 예우하여 모셨다. 성주사는 이후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기록될 정도로 이름난 가람이었으며, 문도가 성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사선(四禪)이라 불리는 순애, 원장, 영원, 현영을 비롯하여 증량, 보신, 심광 등 2000여 신도가 배출되어 신라에서 제일가는 선문도량으로 이룩하였다.
무염국사가 입적한 뒤 진성여왕은 그에게 '대낭혜화상'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하였다. 탑비는 높이 4.5미터 너비 1.5미터 두께 42센티미터로 규모 면에서 신라시대 제일의 비석으로 꼽힌다.


아래쪽의 작품은 성주사 금당에 있는 오층석탑을 조각한 것이다. 이 탑은 대한민국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기단은 각면 마다 모서리를 두고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1층 몸돌 아래에 굄돌을 따로 끼운 것은 고려 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 있고 우아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i2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