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인연의 흔적들이 지는 꽃잎으로 나뒹굴고 있다. 그래도 끝내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저 꽃잎 한 송이도 가을이 오는 이 거리를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단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잎 한 송이에도 한때는 넘쳐흐르던 열정이 있었고, 허공에서 수없이 바람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젊은 날의 열정이었으며, 사랑의 열병이었으며, 그 사랑을 위한 정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얼굴들이 스치는 한 계절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산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반반씩 버무려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두 물줄기가 첨벙첨벙 서로 머리를 맞대며 흘러가는 두물머리로 향한다. 그곳 한 작은 카페에서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며 모처럼 여유를 다진다. 그것은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그리움이며 행복이다.
초등학교 이후 아직도 버리지 못한 버릇 하나가 편지 쓰기이다. 인터넷은 인터넷대로 재미나게 활용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꾹꾹 눌러쓴 친필과 따뜻한 침 발라 우표 한 장 붙이는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교감해보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일 것이다.
교외로 나와서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편지를 쓰는 일은 나 자신을 반추하고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온 삶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모자란 것이 많기에 그 모자람에 기꺼이 위안의 손길을 주고, 마음을 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물론 오직 글을 쓰기 위해 강가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함께 호흡하며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력의 기운을 마음껏 뿜어대는 자연의 풍경이다.
저녁 무렵 모락모락 피어나는 강촌의 연기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을 벗 삼아 한 철을 뜨겁게 살아온 농부들이 자신들의 땀방울로 익어 가는 곡식으로 보람을 찾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땀방울만큼 뜨거운 장작불이 타오르는 아궁이에 대한 영상은 허공에 하얗게 흩어지는 굴뚝 연기 한 장면으로도 모든 것을 그려내고 실감할 수 있다.
또 한 계절이 가고, 추운 겨울이 오면 아랫목을 데워주는 것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는 어머니의 사랑과 시래깃국에 온 식구가 밥 말아 먹고 즐거워하던 안빈낙도의 삶 때문이기도 하다.
불타는 장작을 보면 다비식(茶毘式)을 올리는 노스님의 경건함만큼이나 많은 상념을 하게 한다. 장작은 분명 신록의 잎들을 달고 당당히 저 벌판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물처럼 밀려가는 세월 따라 노쇠한 핏줄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잎들도 빈혈을 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잎들이 단풍으로 낙화하듯이, 엽록소 철철 흐르던 그 생목이 마른 장작더미로 남아 최후에는 경건한 불빛으로 타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따뜻한 군불을 지펴주는 사랑의 배움이며 실천일 것이다.
농촌에 그런 사랑과 따스한 삶의 풍경을 접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다. 그리고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마른 장작이 타들어 가는 동안 겨울 숲에는 푸른 이끼를 달고 서 있는 위대한 생명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으리라.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자연에서나 반면교사 하며 나를 깨닫고 영혼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숲의 오솔길이 나온다. 산다는 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바람 같은 것일 때만 있는 게 아니다.
실상은 뒤돌아보며 걷는 숲길이 삶 같은 것이다. 그래서 숲은 인간 삶의 표상으로 은유 되고 그런 삶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미래는 가슴으로만 벅찬 것이지만 뒤안길의 모습은 숱한 기억과 상념의 낙엽으로 나부끼거나 비에 젖어 흙으로 돌아가는 삶의 징표이기도 하다.
독일 속담에 '탐욕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다. 나의 안일을 위해 주위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삶은 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것이다. 자기만의 희망은 아집이며 탐욕으로써 진정 그 깊이는 물 붓기라는 것이다. 희망은 자꾸 담는 것이 아니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다.
그럴수록 담을 공간은 넓어질 것이며 그 공간에는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찰 것이다. 삶도 자연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다. 고목이나 아름드리나무들이 숲의 중심을 잡고 서 있듯이 어쩜, 숲은 모성애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의 어울림 마당이다. 그런 식물들의 집성촌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슬프거나 절망할 때마다 모성애를 생각하며 마음 다잡는 사람들처럼, 늘 비워내며 사는 헌신적인 모성애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모성애란 무엇일까? 사골국물 우릴 대로 우려서 밥상머리에 앉은 자식들의 시장기를 다 채운 후에 당신은 정녕 사골 뼈처럼 야위어 가던 모습. 동구 밖 장승처럼 한평생 서서 조건 없이 분주한 시간의 여행을 떠나온 그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던가?
두물머리에 와보면 그런 모성애와 만나게 된다. 한 그루의 고목 아래서 마주한 그루터기의 일생이 그러했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제 몸 다 베어주고 빈자리로 남아 마지막 작은 생명들을 키워주는 풍경을 보았다.
어릴 적 봄날에 소몰이 하다가 삐비꽃 뽑아 물고 머루 다래 따 물면서 그 그루터기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이 두물머리에서도 그루터기가 푸른 이끼를 뒤집어쓰고 그 사이에 소년과 소녀의 웃음 같은 작은 식물 줄기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껴안은 식물은 푸르기만 하지만, 그 푸름이 더욱 빛났던 것은 그루터기의 여정만큼 검게 탄 나이테 때문이다. 수 없이 나이테를 내두르면서 늘 허공에는 지난 날 기억의 깃발을 나부꼈을 것이다.
그루터기의 자생력은 그런 기억의 재생산에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미래도 중요한 희망의 길이 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역사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허공에 뻗어간 길이 지워졌다고 해서 지나온 날의 추억마저 다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산다는 일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시나브로 지나온 길 위에 묻힌 흔적들을 되살리며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징검다리를 건너갈 줄 아는 지혜의 터득에 있다.
모든 사물보다 위에 있고 싶은 것은 인간의 탐욕뿐이다. 탐욕은 늘 불안하다. 위에 위치하는 사물은 늘 불안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왜, 떠오르는 일출에 환호하면서 저무는 노을 빛 앞에서는 침묵하는 것일까? 저물어 가는 일은 자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저무는 한 계절의 끝자락에서는 아집과 욕심 잡아 당겼던 태엽의 키를 스스로 풀어낼 때이다.
나를 버릴 때 남의 작은 사랑마저도 내 작은 가슴에서는 큰사랑의 나무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법이다. 막힌 강물은 흘러가야 한다. 그 시간의 긴 여행, 아름다운 여정을 위하여 버리고 비워버리자.
그 빈자리에 새롭게 맞는 한 계절의 태양 빛이 찬란하게 쨍그랑 쨍그랑 빗발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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