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성북동은 상위 1프로와 하위 1프로가 공존 하는 곳이다. 성곽마을 밑에는 상위 1프로가 사는 부자마을이다. 성곽을 끼고 한참을 오르면 하위 1프로가 사는 굽이굽이 골목의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는 성북동 비둘기 시를 만든 김광섭(1905~1977) 시인이 살기도 했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를 만든 시기는 1960년대 말이다. 시의 내용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고 채석장의 포성이 정적을 깨면서 비둘기는 갈 곳을 잃고 거리 곳곳으로 날아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도 김광섭 시인이 살았던 산꼭대기는 서민들의 삶이 오가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인지 성북동에는 유달리 비둘기가 많다. 비둘기는 아침이슬이 내린 돌 위에 앉아서 구구구를 한다. 아마도 김광섭 시인을 잊지 못하는 비둘기가 시낭송을 하는 것이라 하는 분도 있다. 구구구 다음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마도 삶이 어려운 세상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언어를 구사하다가 떠난, 김 시인의 시 구절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아침이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골목의 계단에 말없이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 발밑, 돌계단 사이에 일일초 두 그루가 뾰조롬히 꽃을 피운다. 할머니는 행여 꽃이 다칠까 벽돌 한 장을 일일초 옆에 놓아두었다. 하나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을이 별스런 풍경으로 느릿느릿 가고 있다.
마을의 가운데는 그 옛날에 사용한 우물터가 있다. 마중물을 넣어야만 물이 어렵사리 나온다. 마을 반장이 중심이 되어 수족관을 만들고 장수한다는 거북이를 넣어놓았다. 미꾸라지는 하루 종일 거북이를 피하여 수족관을 맴돌고 있다. 우물가 나팔꽃은 수를 헤아릴 수없이 보라색으로 동네방네 나팔을 불고 있다. 어인 일인지 나팔소리는 나지 않는다. 향수를 달래려는 할아버지가 박 나무를 심어서 두어 개 열려있는 모습이 영락 시골의 정경을 빌려온 듯하다.
이곳은 슬픔을 정리한 사람들이 사는 듯싶다. 골목길에 어슬렁거리고 지나가는 고양이가 유달리 윤기의 털을 뽐낸다.
모든 건 나에게 달려 있다. 온갖 스트레스와 고민거리를 한 아름 지고 가도 풀어 놓지 않으면 바리바리 도로 싸들고 나에게로 오고 만다.
치유와 회복은 나에게 있다. 내게 편안함과 휴식, 나른한 기분 좋음을 주는 것은 꼭 부유함과 좋은 음식에만 있지 않다. 골목에 마주치는 할머니와의 대화가 오늘의 행복이다. 지나온 삶과 눈앞의 산적한 걱정이 모두가 내가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층 밝은 생각으로 나아갈 때 내 것이 된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건 슬픔의 색깔이다. 슬픔의 냄새와 슬픔의 더께를 더하면 내 마음은 뚱뚱하여 진다.
오늘은 성북동의 김광섭 시인이 살았던 성곽마을을 오르며 나의 흘러가는 어제를 뚝뚝 흘러 보내버리자. 걱정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걱정의 유전자가 자란다고 톨스토이 할아버지가 <인생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성북동의 골목에서 만난 할머니가 빨간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할머니는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이 선물해준 빨간색이 더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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