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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천문, 장영실의 친구는 과연 세종이었는가"

조선의 시간과 하늘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장영실…조선의 두 천재의 숨겨진 이야기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세종대왕(1397~1450)과 장영실(1390~?)을 주제로 한 영화 '천문(天問, 허진호 감독)'은 새해 벽두부터 감상자들에게 무한 상상의 문을 열어주었다. '천문'은 세종에 초점을 둘 수 있고 15세기 세계적인 과학자, 장영실에 연민이 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의 영화 '천문'에 대한 또 다른 방점은 '친구 장영실'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세종대왕은 조선 역사에 위대한 왕임은 불변하다. 1998년 <주간동아>는 10명의 역사학자와 함께 한국사 1,000년을 만든 100인을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세종대왕이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세종대왕은 존경하는 인물 1위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다. 5만 원 권이 나오기 전 1만 원 권 화폐의 가장 오래된 모델이 세종대왕이다.

그러한 세종대왕에게 절실한 친구 장영실이 있다. 정치인 세종은 외로운 왕이었다. 한글창제라는 세종에게도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천재는 천재와의 소통이 필요한 법이다. 역사학자들은 세종이 장영실을 통하여 천문학 관측기기와 측우기, 자격루, 농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을 부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종대왕은 기막힌 가족사를 가졌다. 왕위에 오르자 큰아버지 정종이 승하했다. 정종의 3년 상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 아버지가 잇달아 숨졌다. 무려 7년간 상중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세종대왕에게는 50여 가지의 질병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질환이 당뇨와 고혈압, 전립선이었다.

건강이 그렇다 치지만 자식복도 없었다. 맏딸인 정소공주는 13세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은 20세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은 19세에 요절했다. 자식 사랑이 끔찍했던 세종으로서는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꼈을 법하다. 이런 고통의 순간마다 세종대왕은 여러 각료를 부르기보다는 친구 장영실을 찾았다. 지혜의 왕이라는 세종의 정치적 상황은 비정의 권력투쟁이 난무한 원인도 있다.

세종은 친구 영실에게 아픈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를 받는 것이 유일한 방편이 되어버렸다. 세종대왕의 큰 며느리는 당대에 상상을 넘는 행실을 보였다. 요즘에도 이해가 어려운 레즈비언이었다. 큰아들의 세자빈 순빈 봉씨는 구중궁궐에서 낮술을 즐겼다. 소쌍이라는 여종과 동성애에 빠져 동침을 일삼았다. 시아버지로서 차마 밝히기도 부끄러운 음행이었다.

이런 일을 알았을 때도 세종은 아무 말 없이 장영실의 연구실을 찾았다. 침묵으로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만지다가 결국 장영실과 독한 술잔을 기울였다. 그에게 애간장 타는 마음을 열곤 했다. 장영실은 비록 어머니가 관비였지만 세종대왕과 유일한 소통 자였다.

천하의 세종대왕이라도 친구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을 알게 하는 소중한 실록이다.

영화의 감상평은 자유다. 그러나 천문의 세종은 절대고독의 왕이었다. 만약 장영실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위대한 세종의 기록은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47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 친구는 장영실뿐이었다.

역사는 늘 그렇게 해피엔딩이 아니다. 수많은 내신과 양반들은 천민 출신, 영실과 친구로 지내는 세종대왕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가 소원하도록 끓임 없는 모략은 지속되었다. 요즘 정치용어로 '편 가르기'다. 결국 세종의 친구 장영실은 사건에 말리어 종적을 감추고 만다.

'천문'이 문을 닫았다. 세종은 장영실을 보내고 삶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왕도 잠시 머물다가 갈 뿐이다. 촛불이라도 켜놓고 우아한 담소와 술잔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영실, 어느덧 달빛도 다가와 함께 취했던 영실과의 멋진 생각만이 그의 생을 눌렀다. 세종은 천민 출신의 장영실을 만나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날이 어른거린다. 세종은 영실을 만나며 왕과 백성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다. 세종은 신분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정치인 세종은 친구, 영실을 구하지 못했다. 집요한 권력 투쟁의 비정한 상황에서 친구의 손을 놓아버렸다. 오늘도 세종의 정치 후배들은 또 다른 장영실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장영실이 그립다.

- 최창일(시인·이미지문화학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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