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양방송) 고진아 기자 = 국가보훈처는 3월의 독립운동가로 3·1독립만세운동과 일제 식민지배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영국인 F.W.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를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1889년 3월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1907년 개나다 토론토로 이주, 토론토대 온타리오수의과대에서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고 1916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입국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ㆍ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가 학살을 자행한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의 참상을 사진으로 촬영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 곳곳에 폭로했다.
이 때 스코필드 박사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 1919년 5월27일자에 실렸으며 ‘수촌 만행 보고서’는 미국 장로회 기관지 프레즈비티리언 위트니스 1919년 7월26일자에 실렸다.
3ㆍ1 운동을 세세히 기록하던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면회하고 조선총독부에 감옥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고문과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해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을 거쳐 토론토의 개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 목사에게 보냈다. 이것은 1919년 7월 발행한 ‘한국의 상황’에 증거자료로 실렸다.
그가 찍은 사진은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일부가 실리고 영문 사진첩 ‘한국독립운동(1919)’에 실렸다.
특히 스코필드 박사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을 비롯한 일제의 만행 피해자 사진은 서울주재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쯔에게도 전해져 1919년 7월17일자 美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됐다.
같은 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극동 지역 선교사 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일본 수상 하라를 직접 만나 한국인에 대한 억압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을 받게 된 스코필드 박사는 1920년 4월 한국을 떠났다.
스코필드는 언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여론에 호소함으로써 이를 개혁하고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