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발자국 없는 발자국' 외 3권의 시집과 소설집 '기관사의 첫 사랑'으로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이순희 작가가 새 장편소설 '신 분례기(新 忿禮記)'(용성출판사)를 내놨다.
여류작가 특유의 문장에서 빛나는 섬세한 결이 더 풍부한 이야기와 긴 호흡 속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이순희 작가의 장편소설 '신 분례기'는 남존여비 사상과 남자로 대통을 잇는 옛 우리 풍습 때문에 나오는 씨받이 사건을 소설화해 1970년대 최고의 문제적 작가로 떠오른 소설가 방영웅의 '분례기(糞禮記)'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 모든 서러운 시골 처녀의 초상이자, 시대를 초월한 모든 불우한 자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먼저 이 작품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여인인 어머니와 딸의 파란만장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소설 전개에 감동하게 된다.
주인공 '분례'와 그녀의 어머니 '온씨'. 어머니 온씨는 온씨 가문의 귀한 딸이지만 하녀 신세가 되어 주인 양반의 씨받이가 되고, 잠시나마 사랑 받는가 했더니,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아 쫓겨나야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처절한 삶과 고통, 그리고 숭고한 자식사랑이 독자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하고 있다.
핏덩이를 말로만 듣던 양반집 대문 앞에 버려두고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어미의 고통과 마음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다가온다.
또한 자식만큼은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 때나마 지아비로 섬겼던 윤생원의 본처가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악랄한 패악 질에 피투성이가 되어 쫓겨나자, 온씨는 윤생원 친구 중에 마음씨 좋고 인품이 넉넉한 이참봉 이야기를 생각해 내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뚱이를 이끌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핏덩이를 품에 안고 문전걸식을 하며 물어물어 찾아가는 애닮은 모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든다.
짐승 밥이 되면서까지 지켜낸 자식, 온씨의 판단은 옳았다.
성품 좋은 이참봉은 분례를 친딸처럼 잘 키우고 온갖 유언비어에도 굴하지 않고, 업둥이를 복덩이로 받아들여 자신의 양딸로 호적에 입적까지 시키는 등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
악랄한 윤생원 부부와는 상반되는 고운 성품의 이참봉, 그리고 부인과 모친의 분례 사랑,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발견된 온씨의 시신은 또 독자로 하여금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쁘고 영특한 분례의 성장과, 분례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고 분례는 생모의 죽음을 접하고 대성통곡한다. 이참봉은 분례의 성을 찾아 윤분례로 살게 해준다. 충직한 노총각 머슴 만수와 분례의 달콤한 사랑, 그리고 축복 받은 혼례식 전개는 또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든다.
분례는 만수와의 사이에서 몽일, 몽이, 몽산, 몽대, 몽수, 몽용, 몽칠, 몽팔, 몽구 등 아들만 9명을 낳으며 아들을 갖지 못한 어미 온씨의 한풀이를 하며 이참봉 댁에서 분가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해가며 가난해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간다.
다만 분례의 남편 만수가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하지만 9명의 아들들이 각자 성공하고 분례 자신도 어엿한 횟집 사장님이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소설의 이야기는 헤피 엔딩으로 장식한다.
이순희 작가는 신작 장편소설인 '신 분례기'에 대해 "비록 허구라는 문학의 장르를 빌어 소설화 하였으나 실은 논픽션이라 해야 맞을 생생한 시대의 편린(片鱗)들을 모아 기술한 것"이라며 "'신 분례기'는 나의, 우리 부모세대의 이야기라 보면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가는 그러면서 "첨삭에 민감하기보다는 조금은 털털하고 덜 익은 능금 같은 표현방식을 이향(異鄕)한 것"이라며 "이 땅의 젊은 세대들에게 투박하고 박복했던 윗세대들의 삶을 이해하고 반추(反芻)하는 기회로 삼게 하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충남 보령 출신인 이순희 작가는 『한국문예춘추』 시 등단, 『문예사조』 수필 등단, 『문예춘추』 소설 등단한 여류작가로 그동안 시집 '발자국 없는 발자국' 외 3권과 소설집 '기관사의 첫 사랑', 장편소설 '신 분례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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