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동양방송) 김동희 기자 =국가보훈처는 ‘이경복·백성흠’ 공군 소위(당시 상사)를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채 일주일도 안 돼, 북한군은 한강을 건너 빠르게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적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항공정찰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정찰기는 L-5연락기 12대와 T-6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북한군이 한강철교 도하를 시도하자 공군의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는 “적들이 한강철교를 이용해 탱크를 도하시킬 것으로 보인다.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는 한 조가 돼 급조된 폭탄을 싣고 수원기지를 이륙해 흑석동 상공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강 인도교를 발 아래로 보면서 한강 철교쪽으로 기수를 돌려 북쪽 어귀를 정찰하던 중 북한군의 대공사격에 피격됐다. 피격된 순간 그들은 적의 탱크 수십대를 발견했고 기체 일부가 적탄에 피격돼 점점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경복 상사와 백성흠 상사는 수원기지에 적진의 상황을 무전으로 알렸다. 이 정찰보고로 미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유도해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서울=동양방송) 고진아 기자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마거릿 히긴스’ 미국 종군기자를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마거릿 히긴스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후 취재 기간의 대부분을 최전선에서 보내며 6·25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특히 그녀는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통영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우리 해병대의 상륙작전을 직접 종군 취재하면서 그들의 용맹성을 전 세계에 알려 이후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그녀가 헤럴드 트리뷴 본사에 타전했던 “귀신도 때려잡는 해병(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이라는 표현은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의 자랑스러운 애칭으로 자리 잡게 됐다. 늘 종군기자의 사명감으로 현장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는 유엔군 병사들과 함께 빗발치는 총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이를 생생히 타전하여 세계 만방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알렸다.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워 인 코리아(W
(서울=동양방송) 고진아 기자 = 국가보훈처가 최득수 육군 이등상사를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한국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1953년 6월 26일 강원도 양구 인근, 중공군은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 속에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비석고지를 점령했다. 이에 최득수 이등상사가 배속돼 있는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는 백병전까지 치르며 격렬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적 수류탄에 대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역습에도 적은 좀처럼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우리 측 인명 손실만도 1,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투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6월 30일 새벽 2시, 전우의 희생을 보다 못한 제8연대 2대대는 30명의 대대원으로 이루어진 특공대를 조직하 최후의 결단을 실행하였다. 수많은 전우의 목숨을 앗아간 비석고지에 설치된 적의 기관총 진지에 이르자 특공대 제1조장인 최득수는 곧바로 선두에 서서 돌진해 나갔다. 적의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특공대는 적의 기관총이 파괴됐음을 알렸고 특공대의 신호탄과 함께 대기하던 아군은 새벽 4시 30분 적의 진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