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 동양방송) 고진아 기자 = 국립대전현충원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그 위훈과 공적을 높이고자 구국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역설하다 아들과 함께 순국한 '구연영 순국선열'을 1월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구연영 순국선열은 1896년 1월 1,000여명의 의병으로 이천 수창의소를 조직했고 종군대장으로서 넓고개 전투와 이현 전투 남한산성 전투를 지휘해 큰 승리를 거뒀다. 그 후 기독교에 입문해 이천중앙교회 담임전도사로서 선교활동을 하며 구국회를 조직,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 항일투쟁을 하다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군 수비대에체포돼 아들 구정서 전도사와 1907년 8월 24일 총살당했다.
한편 기독교 감리회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순국한 구연영 부자는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1022호에 안장돼 있다.
선생은 1864년 6월 20일 구철조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경기도 광주군 실촌 지역에 세거해온 유력 가문에서 엄격한 충효정신의 바탕 위에 충군애국사상을 배우며 자랐다.
구연영 선생은 국가보훈처 선정, 2014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추서되기도 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자 선생이 참여한 남한산성의진(이천수창의소)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돼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달 이상 점거하며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쳤다.
선생은 의진의 중군장으로서 1896년 1월 18일 백현(이천 널고개)전투를 압승으로 이끌며 을미의병의 쾌거를 이뤄다. 이후 원주 방면으로 이동, 수백 명의 군사를 모은 선생은 같은 해 2월 25일 광주 이현에서 다시 포군과 민병을 규합하고 광주의병과 연합해 남한산성을 점거했다. 선생은 이 수성전에서 중군장으로 의진의 본부가 있는 중앙을 맡아 지켰으며 관군의 공격으로 해산되기까지 한 달 동안 관군과 대치해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해산한 후 김하락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영남지방에서 여주, 제천, 단양, 풍기, 순흥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영남의병과의 연합항전 방략을 논의하기도 했다. 1896년 5월 한 달 동안 청송 감은리, 의성 수정사 등에서 수차에 걸쳐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온 구연영 선생은 광주군 도척면 노곡리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됐다. 1899년 이천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1902년 지역교회를 관리하는 권사가 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이천에서 구국회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했다. 이후 선생은 이천, 광주, 여주 등지를 돌면서 구국회를 기반으로 군중집회를 통해 일진회의 반민족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등 구국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선생의 이러한 활동에는 애국단체 보안회와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장남인 구정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으나 한편,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장남과 함께 체포돼 1907년 8월 24일 부자가 동시에 순국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선생은 일제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온 몸을 던져 구국투쟁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이후 기독교를 수용해 대중구국투쟁을 펼치다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