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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라일락꽃 가슴이 소태가 된 사연"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라일락은 물푸레나무과 수수꽃다리 속에 속하는 교목으로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북한산 지킴이 노릇을 한 나에게 북한산을 제일 먼저 오른 사람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나무꾼'이 아니냐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라일락꽃은 나 말고도 유럽의 남부지방, 따뜻한 곳에 이런저런 종들이 살고 있다. 시간은 흘러 새로운 종들이 탄생, 지금은 그 종의 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물론 알려 들면 모를 리 없지만 나는 그리 한가한 식물은 아니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도봉산의 나와 유럽 종은 다소 다른 얼굴을 가졌다.

5월이면 나는 어느 꽃보다 바쁘다.

시인 노천명은 '푸른 오월'이라는 시에서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라고 낭송했다.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5월에 태어났다. 그리고 오월에 세상을 떠났다. 5월을 사랑한 그는 '오월'이라는 시를 남겼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오월이면 마치 시인처럼 설레고 바쁘다. 사실은 이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이 파도이듯, 아픈 사연이 하나둘쯤 있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시간은 한국의 군정기인 1947년에 시작 된다. 당시 미국은 군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한국에 상주시켰다. 그중에는 캠프잭슨에 근무하는 미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 엘원 M. 미더(Elwin M. Meader, 1910~1996))라는 사람이 근무했다.

그는 식물학자답게 주말이면 같은 사무실의 타이피스트 미스 김과 함께 북한산, 도봉산을 수시로 올랐다. 서울이라는 곳이 매력적이었다. 도심에서 쉽게 산을 접근하고 오르내리는 것이 마치 정원과 같았다.

5월의 쾌청한 날이었다. 나는 공중에 떠도는 공기양념을 통해, 향기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의 철학은 순수자연 무공해 향기를 만드는 것이 신념이다. 연탄을 피우던 시절, 매연이 공기에 날리면 숨을 참아 냈다. 최상의 라일락의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한데 심각한 상황의 조짐이 보였다. 이것은 불길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도봉산에 거주하는 나에게 식물학자 엘원은 그날따라 매의 눈으로 눈여겨 살폈다.

찬찬히 들여다보며 아무 말 없이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미스 김과 산을 내려갔다. 엘원은 주말이면 의례히 나를 찾았다. 산행은 오로지 나를 보기 위한 것이 되었다. 붉은 휘파람의 시간, 씨앗을 맺게 되었다. 엘원은 씨앗을 습자지에 싸고 싸서 조심스럽게 채집통에 넣었다.

그는 한국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채집한 식물은 보물을 다루듯 소중하게 본국으로 가져갔다. 엘원은 도착과 함께 도봉산의 수수꽃다리종인 라일락을 그의 종묘장에 뿌려졌다.

100년 전 하와이나 멕시코에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의 심정과도 다를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뿌리를 내렸고 무럭무럭 자라서 꽃을 피웠다. 다행인 것은 1905년 유카탄 반도(멕시코)에 끌려간 선조들과 같이 애니깽(Henequen, 밧줄 만드는 선인장의 일종. 김호선 감독의 1996년 영화)의 슬픈 대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국땅에서 그리운 조국을 생각하며, 가슴은 쓰디 쓴 소태가 되어 버렸다.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말이다.

정말이지 나의 이파리는 쓰다.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 한번쯤 맛보길 권한다. 엘원은 나의 이름을 미스 김이라 하고, 팻말도 그렇게 붙여 주었다. 엘원은 타이피스트 미스 김을 사랑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한국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고마움에 그의 성을 붙였을 수도 있다.

엘원은 나를 멋진 라일락으로 개량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키 작은 '미스 김 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 품종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탄생된 나는 1970년 한국으로 역 수출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모습은 꽃봉오리가 맺힐 때는 진보라색, 점점 라벤다색으로 변하여 만개 시에는 하얀색으로 변하고 매혹적인 향기를 낸다. 배우 소피아로렌이 한눈에 반하여 몇 그루를 구입하여 정원에 심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인사들은 하나 같이 모셔갔다.

나는 비오는 날에는 향기를 내놓지 않는다. 제아무리 비가 얼굴을 비벼도 향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바람 부는 날에 향기를 내려놓아, 사람의 마을,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사람과의 교감이 좋았다. 그것은 신념이기도 했다.

문덕수 시인은 시 '라일락 향기'에서 나를 들어 "도둑 떼처럼 숨었다 와락/ 달려드는 라일락 향의 덩어리/간밤에 만주를 누비던 독립군이다"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문화학자, '시화무' 저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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