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새해 아침, 시들의 건축 풍경'

2023.01.01 09:09:32

"시는 낯선 의식이 드나드는 의미의 결(潔)..."그 의미의 풍경(風景)들"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가 무엇일까요. 시도반(詩道伴, 시 공부자)들과 대화 중, 질문을 받거나 질문을 한 적이 많다. 아무개 시도반은 행(行)과 행이 걸어가는 것이다. 연(連)과 연으로 연결된 언어의 건축이다. 다른 아무개 시도반은 아이들이 블록으로 집을 만드는 것과 같이 빨강, 노랑, 형형 색의 블록을 쌓는 것이다. 왼쪽에 앉은 시도반은 하얀 산을 표현하는 알프스 몽블랑의 정상에 눈이 쌓이듯 하얀 집이라 한다.

재치 넘치는 재미있는 표현들이다. 시에는 그 안에 무엇인가 의미를 숨겨 넣어서 보석과 같은 집을 지은 것이 분명하다. 요들송의 스위스를 시인들과 여행을 한다. 산속에 옹기종기 지어놓은 집들이 평화롭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조용함만이 사는 마을처럼 보인다. 조용함이 산길의 마을을 걸어 다닌다.

차창 밖을 보던 얼굴 하얀 시도반이, 시인이 만든 마을 같아요. 마을이 시를 쓰고 있어요. 일행은 낯선 마을에 저녁을 가방에서 푼다. 전등불이 켜져 있는 방안이 조명으로 은은하게 들여다보인다. 모르는 도시에 모르는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은 인간의 백합꽃을 피우는 것처럼 평온하다. 이를 두고 밤이 아름다운 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나 싶다.

시는 낯선 의식이 드나드는 의미의 결(潔)이다. 그 의미의 풍경(風景)들이다.

지구상 80억여 사람들은 개개인은 나라를 가졌다. 여행하게 되면 나라에 대한 내 안의 의미들이 새삼 발견된다. 그것을 우리는 조국(祖國) 관이라 한다. 낯선 풍경에서 새삼스럽게 조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엉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를 찾는 순간이다. 머릿속에 짓누르는 모든 고민과 번뇌를 가지고 여행을 하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서고, 내 마음대로 멈추며, 내 마음대로 방향을 틀고,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여행의 정의가 될 수 있다.

서 있는 지점에서 주체성을 찾게 된다. 단순하게 망각했던 깊고 깊은 의미를 주섬주섬 알게 한다. 오감을 열어 놓고 오감이 느끼는 대로 낯선 자연과 만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 유목민의 DNA를 하나씩 깨우고 일으켜, 생동하는 봄의 환희와 같은 것을 교감한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새롭게 태어나고 감사해야 하는 것, 내 조국을 멋지게 기억해야 한다는 다짐과 감사를 느낀다. 우산의 우리말은 슈룹이다. 한글 해례본에 나와 있는 말이다. 밖에 나가보면 슈룹(나라)이 나를 받쳐주는구나, 깨달음을 일깨운다.

얼마 전까지 한국을 민들레 바람으로 여겼던 유럽의 나라들이 최근엔 부쩍, 한국의 문화를 가까이하려 한다. 명절이면 뉴욕의 한인 음식점은 줄을 선다. 한국의 음식을 느끼고 즐기기 위해서다. 나라가 슈룹이 된다는 현상을 깨워주고 알게 한다.

지나간 순간순간이 내 삶의 조국이 건네준 시였다. 내적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한참 뒤에야 깨닫는다. 늦게라도 깨닫는 것이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친 땅에서도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말인 '불광불급(不狂不及)',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요즘 세상은 천재들도 많다. 깜짝 아이디어나 실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래전에 정민 교수가 펴낸 <미쳐야 미친다>를 읽고 탄복했다. 그 책의 주인공은 18세기 조선에서 모든 순간을 꽃으로 살다간 이들이다. 그들이 격변의 시기를 앞장서 개척하면서 사회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었다. 뼈아픈 시련을 자기발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는 시대의 가슴과 만나는 것이다. 시대의 이야기로 언어의 집을 지은 것이다.

인조 왕 시대의 우매한 시대상을 그린 <올빼미> 영화가 인상적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통하여 당시의 거룩하지 못한 이야기를 숨 가쁘게 전개한다. 긴장감으로 이끄는 것은 감독이 사용하는 영상미의 힘이다. 언어는 어떻게 새우고 연결하는가에 감동과 느낌을 전달한다. 얼음장 밑에도 고기는 헤엄치고 있다. 얼음장 밑과 눈보라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보는 것이 언어의 건축이다.

권일송 시인은 그랬다. 언어가 고통으로 흔들리는 그 순간마다 시인의 마음에는 백합화가 피어난다. 주체하기 힘든 방황이 뜨거운 언어가 집을 짓는다 했다. 뜨거운 것만이 붉은 것은 아니다. 차가운 시련 속에 피는 동백은 붉다 못해 천길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시는 죽을 수 없으므로 영원한 집을 짓는 것이다. 지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영원을 위해 언어의 건축을 하는 것이다. 종말을 거부하는 집이 시의 건축이다.

- 최창일 시인(이미지문화학자, '시화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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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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