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무의 '영화 읽어주는 남자'] 신성일을 추모하며 : <별들의 고향>

  • 등록 2018.11.04 12: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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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감독의 데뷔작으로 1974년 개봉 당시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등으로 이어진 1970년대 멜로드라마의 대표작
신성일, 1960년대 멜로영화에서 불안한 청춘의 이미지에서 기성세대의 이미지로 등장
기존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감성의 연애담론을 추구

(서울=미래일보) 김시무(영화평론가) =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Heavenly Homecoming to Stars, 1974)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경이로운 데뷔작 중 하나다. 개봉 이후 105일간 46만4천여 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같은 수치는 당시까지 한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기록이었다.

이 작품의 중요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성공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기존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감성의 연애담론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신인 감독이었던 이장호의 감각적인 연출력을 꼽을 수 있겠다.

끝으로 배우들의 연기앙상블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주연배우인 신성일과 안인숙의 콤비플레이가 돋보인다. 청순미와 발랄함으로 무장한 안인숙의 연기는 '경아'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로 새롭게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배우 신성일의 연기변신은 개봉 당시부터 인구에 회자됐던 일이다. 핸섬한데다 강단(剛斷)이 있는 기존 정형화된 캐릭터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안티히어로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별들의 고향>은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한 천사 같은 여성이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몇몇 남성들에게 순정(純情)을 받쳤다가 배신당하면서 차츰 타락해간다는 일종의 멜로드라마다.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강변마을이 전경으로 펼쳐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애상적인 주제곡이 배경으로 깔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남자가 유골함을 안은 채 선착장을 찾는다. 비극적인 대단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도입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문제의 유골함을 안은 채 처연한 표정을 지었던 그 남자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신성일이다.

극중 이름은 김문호이고, 직업은 화가다. 문호의 적나라한 일상사들이 하나둘 소개되면서 그 유골함을 둘러싼 절절한 사연들이 이제 펼쳐지게 될 터이다.

<별들의 고향>은 경아라는 여자가 네 명의 남자들을 거치면서 겪게 되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주된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문호는 내러티브 자체의 작인(agent)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러티브 바깥에서 경아의 행적을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는 관찰자 시점에 서 있다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플롯은 경아가 문호와 만나 동거하면서 알콩달콩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장면들 중간 중간에 그녀가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과의 기구한 사연들로 채워지는 복합적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경아의 첫사랑이었던 영석(하용수)은 대단히 현실적인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애에 관한 한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그는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다.

두 번째 남자인 만준(윤일봉)은 일종의 강박신경증(obsessional neurosis) 환자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대단히 가부장적인 남자이다. 또한 그는 사랑과 성은 일치해야한다고 믿고 있는 순결지상주의자이기도 하다.

세 번째 남자인 동혁(백일섭)은 가학증(sadism) 환자라고 할 수 있다. 타인에게 고통이나 치욕을 가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혁은 전형적인 마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인 문호는 어떤가? 그는 일종의 현실 신경증(actual neurosis) 환자이다. 그가 어떤 심리적인 문제로 신경증에 걸렸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 속에서 육체적으로 성적 트러블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문란한 성생활과 경아의 난잡한 사생활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방황한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또 대상이 자신에게 너무 가까이 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여자의 연약함을 감싸줄 수 있을 만큼 인간적이지만,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의 낙천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하는 일종의 불안한 도시인일 따름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회색분자(灰色分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경아의 과거사를 깊이 있게 알아 갈수록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회의에 빠진다. 경아를 매몰차게 비난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그 징벌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그의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경아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택하고, 한편 삶의 최종적인 의미마저 상실한 경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살뿐이었다. 바로 이 같은 비호감형 캐릭터를 당대 최고 스타 배우인 신성일이 맡아서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별들의 고향>의 라스트 시퀀스는 대단한 여운을 남긴다. 경아가 사방이 온통 흰 눈뿐인 설원(雪原)에서 수면제를 삼키고 흰 눈 한 움큼 짚어 삼키는 장면은 결코 잊지 못할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 김시무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라캉의 주체개념 재조명」(2005)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장호영화연구회' 회장, 부산국제영화제 전문위원(Adviser),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사단법인 한국영화학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 3년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맡았다. 저서로는 『영화예술의 옹호』(2001), 『Korean Film Directors: Lee Jang-ho』(Kofic, 2009), 『홍상수의 인간희극』(2015), 『스타 페르소나』(2018) 등이 있다. 이밖에 시나리오 『물고기 하늘을 날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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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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