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있는 詩] 비움으로 피워낸 기백, 인간의 길을 묻다 …우형숙 시인의 시조 '대나무의 삶'

  • 등록 2025.06.26 08: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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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울림, 삶을 통과한 존재의 목소리.…'비움'이라는 존재론적 선택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우형숙 시인이 시조 '대나무의 삶'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서 인간 내면의 수행과 존재의 자세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속을 비워 맑은 기운을 품고, 굽지 않고 곧게 자라며, 가끔은 울음으로 진심을 전하는 대나무의 형상을 빌려, 시인은 '비움'과 '기백', '진정성'의 가치를 고요한 울림으로 담아냈다.

현대 시조의 정제된 언어와 간결한 형식 속에 깃든 이 작품은 치유와 통찰의 시학을 실현하며, 우형숙 시인의 작품 세계가 지닌 깊은 정신성과 도덕적 울림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편집자 주]

대나무의 삶

- 우형숙 시인

내장을 몽땅 꺼내
땅속 깊이 파묻었다

속을 텅 비워보니
맑은 혼에 기백 생겨

독화살 날아온대도
겁날 것이 없어라

곧게 가자 곧게 가자
굴곡진 맘 걷어 내고

옹이진 마음일랑
과감히 삼켜버려

가끔은 스산히 울어
그 속뜻도 알리며


- '대나무의 삶' 전문


■ 감상과 해설/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

'비움'이라는 존재론적 선택

우형숙 시인의 시조 '대나무의 삶'은 자연과 인간, 존재와 수행, 침묵과 울림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은유로 가득하다. 시인은 대나무의 단단하면서도 비워진 형상을 통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내면의 길을 비유하고 있다.

내장을 몽땅 꺼내 / 땅속 깊이 파묻었다
속을 텅 비워보니 / 맑은 혼에 기백 생겨

이 시의 출발은 다소 충격적이다. '내장을 꺼낸다'는 표현은 인간 존재의 중심을 통째로 비워낸다는 과감한 자기 수련을 상징한다.

겉만 남고 속을 비워내는 행위는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 비움 속에서 "맑은 혼"과 "기백"이 피어난다고 말한다. 비움이 곧 생명의 다른 형태라는 깨달음이다. 불필요한 감정과 과잉의 욕망이 제거된 자리에는 오히려 더 단단하고 곧은 중심이 생긴다.

독화살 날아온대도 / 겁날 것이 없어라

이 대목은 비움이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외부 충격을 견디는 능동적 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나무는 내부가 비어 있기에 유연하지만, 외부의 어떤 충격에도 꺾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 사회 속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생존의 방식이자, 존재의 철학으로도 읽힌다. '허'가 '실'보다 강할 수 있다는 동양적 사유가 짙게 배어 있다.

곧게 가자 곧게 가자 / 굴곡진 맘 걷어 내고
옹이진 마음일랑 / 과감히 삼켜버려


시의 중반부는 자기 성찰과 윤리적 자기 요청을 담고 있다. '곧게 가자'는 반복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자아를 향한 강한 명령이다. 상처받고 굽은 마음,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매듭을 삼켜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또 다른 수행임을 시인은 말한다. 시조 형식의 짧고 정제된 언어가 지닌 절제의 미학이 이러한 내면의 다짐을 더욱 빛나게 한다.

가끔은 스산히 울어 / 그 속뜻도 알리며

비운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대나무가 '스산히 운다'는 표현을 통해, 비움 속에 남은 사람의 흔적, 감정의 여운을 솔직히 드러낸다. 중요한 점은 이 울음이 감정의 표출이나 약함의 기호로서가 아니라, 진정성과 진리의 울림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나무는 또 한 번 인간의 형상으로 겹쳐진다. 세상의 바람 속에서 휘청이고, 상처를 입되 꺾이지 않는 존재. 속이 비어 있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대나무처럼, 시인의 목소리 또한 비움의 울림으로 타인의 가슴에 흔들림을 만든다.

마지막 구절은 대나무의 울음을 통해 말해지는, 인간 존재의 진정성이다. 외면은 단단하지만 내면은 여전히 상처받고 아픈 존재. 그럼에도 우리는 '스산히 울어'야 한다. 그 울음은 약함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자의 진실된 기록이다. 비움의 수행 끝에 다다른 울음은, 결국 우리에게 삶의 깊이를 선사한다.


■ 우형숙 시조의 시학, 치유와 수행의 언어

우형숙 시인의 시세계는 맑고 절제된 언어 속에 치열한 자기 성찰과 도덕적 성숙이 깃들어 있다. 시조의 형식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감각과 정서로 삶의 의미를 풀어내는 그녀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위안을 전해준다.

그의 시조집 <산안개>, <괜찮아>, <아침 창가에서>에 이르기까지 종종 '맑고 투명한'이라는 수식으로 불린다. 그러나 '대나무의 삶'은 그 투명함의 바닥에 단단한 윤리적 근육과 정신적 훈련의 흔적을 드러낸다. 단지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정화하여 응축한 메시지로 제시하는 윤리적 서정이다.

자연과 인간, 감정과 사유, 현실과 초월을 잇는 가교로서의 시조를 실현하고 있는 우형숙 시인은 현대시조의 산문화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정형률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 언어를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그의 시조가 단순히 보존적인 작품이 아닌 ‘현대 시조 정신’의 갱신자로 기능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우형숙 시인은 2001년 월간 <한국시>를 통해 시조 부문으로 등단, 시조집 <산안개>, <괜찮아>, <아침 창가에서> 등을 통해 일상의 정서를 섬세하게 끌어올리며, 시조 문학의 미학을 확장시켜왔다. 또한 숙대문학상, 전영택문학상, 여성시조문학상, 역동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오며 시조의 현대적 감성과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해 왔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번역위원장, 한국산림문학회 이사로도 활동하며 문학의 사회적 실천과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대나무의 삶'은 단순한 자연 찬가가 아니다. 그것은 비우고 나아가고, 울고 견디며, 다시 새롭게 피어나는 인간 정신의 노래다. 우형숙 시인은 이 짧고 단단한 시조 속에 우리가 품어야 할 곧은 의지와 삶의 태도를 담아낸다.

결국 이 시는 비움의 미학, 곧음의 태도, 울림의 전언을 고요하고 단단한 언어로 담아낸 작품이다. 독자들은 대나무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떻게 곧게 나아가야 할지를 다시금 묻게 된다.

'대나무처럼 산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시적 명제일지도 모른다.

'대나무의 삶'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자기 성찰의 거울을 내민다. 무엇을 비우고 어떻게 곧게 살아갈 것인가. 그 물음은 지금도 각자의 심연 속에서 맴돈다.

우형숙 시인의 시조는 그러한 물음 앞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비워라, 곧게 살아라, 울음마저 품어라." 그것이 바로 '대나무의 삶'이며, 시인이 시로 증명한 존재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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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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