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정치 풍자 우화형식을 빌어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독재화의 소비에트를 비판하였다. 나아가서 영국이나 독일을 풍자의 대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배반 된 혁명', '타락하는 독재 권력'에 대해 동물을 의인화하여 후학들에 경각심을 불러 주었다. 오웰의 풍자는 시간이 지나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걸어간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자각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치적 목적과 예술의 목적을 융합하여 완벽한 구성, 예리한 통찰력, 부드러우면서도 박진감이 넘치는 문장으로 날카로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작품이 <동물 농장>이다. 오웰의 많은 작품에서도 빼어나다는 평단의 칭찬을 받으며 세계의 독자에게 불후의 명작으로 읽히고 있다.
오웰이 그러하듯 김민기(金敏基, 1951~2024)는 칼이 아닌 음유시인으로 가슴을 적신다. 노래를 듣는 이는 광장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마력도 가졌다. 노래는 합창하게 한다. 스스로 어눌함으로 살아온 김민기는 대학로의 건강한 연극의 중견 사업가다.
주먹구구식의 연극 경영을 4대보험을 들어주는 경영수완을 보였다. 거리에 포스터나 붙이던 연극인이 4대보험을 받게 된 것이다. 하루하루를 걱정하던 연극인이 4대보험의 소식 통보받던 날은 부인과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늘 시대의 광장에 있었다.
김민기는 투쟁하거나 투쟁의 앞장을 선 거리의 투사도 아니다. 그가 부른 노래는 그야말로 최백호의 노래처럼 서정적이다. 그런데도 치열한 곳에서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울림을 주었다. 김민기의 노랫말은 대학가의 젊은이들에게 먼저 도착해 있는 정신의 화살이었다.
양희은 음악가는 '아침 이슬'(김민기 곡)을 부르고 일어나니 저항 가수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자신은 한치도 시대와의 불화 자가 아님도 고백했다. 그런데도 노래는 이미 희은의 앞장을 서서 한발 한발 걸어갔다. 어쩔 수 없는 문화의 목소리 자가 되었다.
김민기는 척박한 대학로에 문화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뮤지컬로, 아동극으로 문화의 머슴으로 앞서 보여 주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왜 독한 병에 들거나 빨리도 별이 되는 것일까. 베토벤은 왜 청력을 잃었을까? 조국의 독립을 6개월 앞둔 시간에 윤동주 시인은 왜 별이 되었을까.
베토벤은 33세에 의사를 찾았다. 이미 이경화 증상이 시간을 넘었다. 당시의 의료에는 그의 청각을 회복할 수 없었다. 6개월간 휴양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쓴다.
이 유서는 이름과 달리, 죽기 전에 동생에 남긴 유언서가 아니었다.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베토벤의 이름을 남길 작품을 쓰고 죽겠다는 결의 서였다. 유서는 동생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보관하였다. 이는 자신에게 다짐의 글로 보인다. 빈으로 이주한 베토벤은 33세 이후부터 청력을 잃는 44세(1814년)까지 11년간으로 이 시기에 교향곡 제3번 <영웅>, 제4번 제5번, <운명>, 제6번 <전원> 제7번 제8번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에 낭만주의 빛깔을 입히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고전주의를 극복했다. 대부분의 장르에서 다양한 악기의 형식을 녹여낸 주옥의 작품을 쏟아냈다. 이 시기를 베토벤의 전성기이자 천재성을 폭발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민기는 깊은 병과의 투병에도 어눌하지 않게 행동했다. 그가 모아둔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였다. 김민기는 전라북도 익산, 의사의 아버지를 두었다. 그의 유전인자는 원초적 예술혼의 노래패였다.
문명이 살아 움직이며 시대의 문명을 깨우는 천재성을 가졌다. 천재는 시대를 변화시킨 자에게 붙인다. 분명 한 시대를 아름다운 노랫말로 변화를 시켰다. 21세기를 산 그와 18세기에 천재성을 보인 베토벤과의 문화의 숲은 같아 보인다. 김민기가 있었기에 대학로의 문화의 환경은 붉은 장미를 피웠다.
"잘 가오. 부디 별에서도 마음 울리는 노랫말을 만들어 주소. 부디 안녕히"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 비평가)
i24@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