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이탄 시인과 이웃에 살았다. 조우(遭遇)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탄 시인의 동인 활동 이야길 듣기도 했다. 1967년에서 1968년까지 최하림, 권오운, 이성부, 김광협 시인과 신춘 시 동인(시학) 활동을 했다.
이들은 한주 한 번씩 만나서 꾸준한 시작토론도 하였다. 이탄 시인이 한주라고 했지만 만남의 주기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이탄 시인에 의하면 최하림 시인은 늘 지각을 하였다. 나오지 않아서 연락하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모임 시간을 잃어버린 일이 자주 있었다 한다.
토론 중 시작(詩作)의 단점을 지적받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경우도 있었다.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 얼굴 붉히며 휭 하고 바람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하니 지적받은 부분이 옳은 고침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아무런 사과도 없이 슬그머니 나와서 토론을 다시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면서 돌아서는 일이 많았다 회고하며 웃는다. 동인이란 시작을 위하여 만나고 토론하지만, 인간 깊숙이의 감정을 앞세우기도 한 것이다. 이탄 시인은 최하림 시인과의 불화가 많았다 소개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 시인은 이외에도 1975년에는 '손과 손가락' 동인을 결성해 활동을 주재하였다. 1979년부터 1982년 사이에는 '민예극단'과 함께 강우식, 정진규, 이건청, 김후란, 이근배, 허영자, 김종해 시인과 ’현대 시를 위한 실험 무대‘라는 명칭으로 시극을 공연했다.
이탄 시인의 서사를 들으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열정이다. 자기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3교시의 시간에 듣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한다. 3교시라는 것은 토론이 끝나고 맥주를 마시면서 시인의 일상을 들으면서 많은 시작(詩作)의 정보지식을 쌓아가는 시간을 말한다.
아쉬운 것은 이탄 시인이 1987년 1월, 중풍을 맞았다. 오랜 병원 생활을 하였다. 꾸준한 투병 끝에 걸을 수 있었고 친한 동료 교수, 작가들과 즐기는 고스톱을 하기까지 건강이 회복되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을 많이 만난다. 사람마다 관계의 선상에서 심리적 거리가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고, 갑자기 선을 넘는 경우가 있다. 유튜브의 대중화로 설핏한 소식이나 불분명한 사실을 진실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감정의 금을 밟았네요." 하고 일러주면 토론이나 만남의 시간은 찜찜한 관계로 돌아서고 만다.
심지어는 상대가 말하지 않는 내용도 말한다. 선생의 얼굴을 보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는 독심술로 상대를 공격하기도 한다. 무모하거나 무자비한 토론의 형식을 빌어온다.
동인 활동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라는 사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나치게 예민한 나'만 남는다. 감정의 표현을 하다 보면 감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기 쉽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몹시 불쾌하네요." 같은 표현이 나가게 된다. 웬만한 심장이 아니고서는 그 자리에 같이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동인 활동에서 토론의 이야기를 듣는다. 작품을 만들어 토론의 형식은 장점만을 말하도록 원칙을 세운다.
그렇게 되면 만들어 온, 시의 단점을 알 수 없지 않으냐는 의문도 갖는다. 단점은 말해주는 장점의 행간에서 찾도록 한다. 장점이 적으면 단점이 많다는 것으로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발표지에 활자화되면 단점이 확연하게 드러남을 깨닫게 된다. 시를 공부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최고의 공부라는 말을 선학에서 왕왕 들었다.
몸을 가꾸듯, 자기표현의 근육을 단련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상대에게 화내지 않고 나의 입장을 관철하는 것이 시가 가지는 중심이라는 것.
- 최창일 시인(이미지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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