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칼럼] 최창일 시인, '시집 첫 페이지, 시인의 말들'

2023.07.06 19:56:04

시의 숲이 무성한 시인은 늘 말수가 적다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집, 첫 페이지는 '시인의 말'로 시작된다. ‘시인의 말’ 속에는 커다란 여백이 들어와 숨을 쉬고 있다. 간결함이 지나쳐 두세 줄의 인사도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머리말, 첫 문장에 온통 신경을 쓴다. 어느 작가는 써놓은 머리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본문을 완성하고도 한 달여를 늦춘, 경우 담도 있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 시인은 "독자여, 이 산문시를 단숨에 읽지 마시오. 단숨에 읽으면 아마 지루한 마음에 그대의 손에서 멀어질 것이오. 오늘은 이 시, 내일은 저 시, 마음 가는 대로 읽으시오. 그러면 어느 시인가 그대의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을 겁니다."라고 '독자에게' 소박하기 이를 때 없는 '시인의 말'로 부탁하기도 한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산문시로 문학적 평가를 받았다. 그의 문학은 한국의 근대문학 형성기인 1910년대에 가장 많이 읽히고 번역되었다. 윤동주와 같은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주관 교수는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번역하며 감동하였다.

커다란 명성을 가졌고 무성한 시의 숲을 가진 시인이 ’독자에게‘ 드리는 말이 겸손하기 짝이 없다.

이무권 시인은 6월의 중심에 <간절기> 시집을 펴냈다. '시간의 주름'이란 '시인의 말'로 독자와 첫인사를 나눈다.

"짧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기억의 잔고는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시간의 등속성과 평면성을 벗어난 지점만이 내 삶의 의미로, 접고 구겨진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주름의 몇몇을 펼쳐 언어의 외피를 입혔다. 간결한 춤사위쯤으로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하산 길 맥 풀린 발걸음 같은 산문이다."

이무권 시인은 문단의 지긋한 원로 시인이다. 시인이 말하는 시간과 주름의 표현이 사뭇 푸르고 풍요롭다.

"이제는, 뱉어낼 듯 뱉어낼 듯 몇 번의 머뭇거림 끝에 비로소 터져 나오는 말더듬이의 첫걸음 같은, 절실한 절제의 언어로만 노래하자고 다짐해본다." 그러면서 "청중의 박수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듣는 척이라도 해주면 고맙겠습니다."로 마무리한다.

시의 숲이 무성한 시인은 늘 말수가 적다. 권일송 시인은 시집을 펴내고 달포쯤 잠적을 한다. 그리고서 박재삼 시인이나 이형기 시인과 같은 동료 선후배 시인에게 전화한다. 펴낸 시집의 분위기를 탐색하는 것이다. "별일 없지"라는 안부를 전한다. 상대 시인에게서 시집에 대한 덕담이 나오면 조금씩 전화의 숫자를 넓혀간다. 선배 시인들은 이렇게 겸손으로 시집을 펴내고 독자와 접근을 하였다.

서효인 시인의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의 자시라는 제목의 글이 재미있다. '세계를 간신히 줄여놓은 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곳에 죽은 사람들의 몸이 보인다. 슬픔도 역겨움도 아닌 감정이 해안선을 따라 고꾸라진다. 이것을 감히 시라고 부를 용기가 없다. 용기라는 감정을 부재로부터 끌어 올려야 한다. 그것이 나는 즐겁다. 지금, 이곳의 세계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중략)로 문장은 신선한 시각으로 시집의 본문을 궁금하게 하고 있다.

<희지의 세계> 시집에서 황인찬 시인은 자시니, 머리말이니 아무런 제목이 없이

'이자혜의 만화<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 라는 아주 짤막한 세 줄로, ‘시집의 제목’을 만들게 된 설명이다. 세 줄은 독자의 상상력을 크게 만든다.

시인들은 이무권, 투르게네프 시인과 같이 바다와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다보는 머리말을 시작한다. 살아있는 네가 죽어 있는 나에게 말을 하듯 한다.

시도반도 <시원(詩園)의 입술>을 펴내며 시인의 말 이전 페이지에 "바람만 살피는 자는 씨 뿌리지 못하고, 구름만 살피는 자는 추수하지 못한다"(전도서 11장 4절)을 올렸다. 독자의 반응은 큰 파도 소리였다. 원로 시인, 허홍구 선배는 시집을 받아들고 다음 시집에 <시원의 입술>과 같이 성경 구절을 넣고 싶다 한다.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사랑도 '첫 마디'의 표현으로 시작된다. 시집의 '첫 페이지'도 사랑보다 강한 인상을 줄 수만 있다면, 천체에 빛나는 축복의 시집이 될 것이다.

- 최창일 시인(시집 '시원의 입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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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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