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도시의 작은 방, 한때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던 공간에 어느 날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따뜻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낡은 가구의 흔적과 먹빛의 기억만이 남았다.
이문자 시인의 시 '먼지, 떠돌다'는 일용근로자의 불안한 삶과 소외된 인간 존재의 고단함을 밀도 있는 언어로 담아내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시 속의 그는 비 오는 날이면 일을 나가지 못해 하루가 막막한 일용근로자다. 부스러기 돈을 모아 방세를 내고, 월세 보증금은 점점 줄어 조각만 남는다. 문 앞에 쌓인 광고지 더미만큼이나 오랜 시간 인기척도 없던 방. 주인 할머니가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엔 텅 빈 공간과 함께 '죄송합니다'라는 미완의 문장만이 방 벽에 남아 있었다.
벽에 붙은 수많은 전화번호는 마치 떠도는 먼지처럼 아무 데도 연결되지 않고, 사람의 흔적조차 푸석푸석하게 버려진 그의 지난했던 날만이 공간에 남는다. 시인은 이 모든 풍경을 '먼지'와 '떠돌다'라는 상징적 언어로 포착해낸다. 존재하지만 곧 사라지는, 그러나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생의 기록을 정제된 시어로 증언한다.
이문자 시인은 "작은 방 하나에도 수많은 사연이 쌓이고, 말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향한 시선은 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삶의 가장자리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떠돌다 사라진 이의 삶은 정말 먼지였을까?
■ 작품 전문
먼지, 떠돌다 / 이문자 시인
얼마 전까지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던 방 안에 냉기가 가득하다 낡은 가구가 있던 빈자리엔 가구들의 살점이 고여 있다 먹빛 살점은 떠난 사람의 사연이다
그는 일용근로자 집에 있는 날보다 나가는 날이 많다 비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불안을 안고 산다 방의 모든 물체가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불안에 떤다
그는 부스러기 돈을 모아 방세를 낸다 큰 덩어리였던 월세 보증금도 줄고 줄어 조각만 남았다 광고지가 쌓인 두께만큼 한동안 문도 열리지 않고 인기척이 없다
티끌 모아서 태산을 만들었던 주인 할머니 티끌을 줍기 위해 그 방을 열었을 때 방 안이 비어 있었다 방 벽에 붙은 종이에 "주인 할머니 죄송합니다"라고 다 맺지 못한 조각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방 벽에 쓰인 많은 전화번호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도는 먼지처럼 아무 번호도 연결되지 않는다 사람 흔적 없이 푸석푸석 버려진 그의 지난했던 날만 남았다
■ 작품 해설 / 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
'먼지, 떠돌다'는 도시 빈곤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들의 현실을 정제된 언어로 포착한 작품이다. 시인은 '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삶과 불안정한 존재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먹빛 살점', '죄송합니다' 같은 표현은 삶의 무게와 미안함을 압축한 시적 장치이며, 전화번호조차 연결되지 않는 단절의 풍경은 곧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말해준다.
이 시는 단지 한 개인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떠돌다 사라진 그 '누군가'는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며,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들의 자리를 외면하는지를 묻는다. 시인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먼지'라는 시어로 길어 올린다.
■ 이문자 시인
시인, 소설가, 칼럼니스트. (사)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위원회 사무국장, 서울종로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 <푸른 혈서>, <삼산 달빛연가> 등 출간. 경북일보 문학대전 문학상 등 수상.
이문자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풍경과 존재의 그림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해내며, 인간 존엄과 삶의 진정성을 일관되게 노래하고 있다.
[편집자의 주]
[詩가 있는 아침]은 시 한 편을 통해 오늘의 일상에 따뜻한 성찰을 불러오는 지면이다. 오늘 소개하는 이문자 시인의 '먼지, 떠돌다'는 삶의 가장자리에 선 존재들, 말없이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시를 통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삶의 풍경을 함께 마주해보시길 바란다. 시는 때로 뉴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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