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터키의 야자수 나무 아래 풍경. 50대의 장년들이 대화 중이다. 가이드 생활을 하는 한국인 교포 청년 철주를 보며 어디에 가느냐 묻는다. 철주는 "남방 옷을 사려 시장에 갑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철주 청년에게 잠시 빈 의자에 앉으라 권한다. 남방은 무슨 색을 살 거냐 묻는다. 철주는 시장에서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겠다 한다. 동네 어른들은 각기 의견을 말한다. "철주는 붉은 계열의 옷이 맞을 거야" 다른 어른은 "녹색계열이 어울릴 텐데". 또 다른 어른은 "무슨 소리야, 철주는 얼굴이 갸름하고 하얀 피부색이니 흰색계열의 남방이 어울린다고." 다섯 분의 어른들은 다른 의견을 말한다. 30분이 지나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철주는 시간이 많지 않아 일어선다. 그리곤 곧장 시장으로 간다. 어른들은 철주가 일어서는 것에 특별하게 관심이 없다. 그들의 토론은 계속된다. 시장으로 간 철주는 평소 좋아하는 남색 남방을 샀다. 점심시간이 이르지만, 시장통에서 간단한 햄버거를 먹고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의 입구에는 동네 어른들이 여전히 앉아 있다. 빈자리에 앉았다. 어른들은 몇 시간째 철주의 남방 색을 결정하지 못하고 토론 중이었다. 이 이야기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가 무엇일까요. 시도반(詩道伴, 시 공부자)들과 대화 중, 질문을 받거나 질문을 한 적이 많다. 아무개 시도반은 행(行)과 행이 걸어가는 것이다. 연(連)과 연으로 연결된 언어의 건축이다. 다른 아무개 시도반은 아이들이 블록으로 집을 만드는 것과 같이 빨강, 노랑, 형형 색의 블록을 쌓는 것이다. 왼쪽에 앉은 시도반은 하얀 산을 표현하는 알프스 몽블랑의 정상에 눈이 쌓이듯 하얀 집이라 한다. 재치 넘치는 재미있는 표현들이다. 시에는 그 안에 무엇인가 의미를 숨겨 넣어서 보석과 같은 집을 지은 것이 분명하다. 요들송의 스위스를 시인들과 여행을 한다. 산속에 옹기종기 지어놓은 집들이 평화롭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조용함만이 사는 마을처럼 보인다. 조용함이 산길의 마을을 걸어 다닌다. 차창 밖을 보던 얼굴 하얀 시도반이, 시인이 만든 마을 같아요. 마을이 시를 쓰고 있어요. 일행은 낯선 마을에 저녁을 가방에서 푼다. 전등불이 켜져 있는 방안이 조명으로 은은하게 들여다보인다. 모르는 도시에 모르는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은 인간의 백합꽃을 피우는 것처럼 평온하다. 이를 두고 밤이 아름다운 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나 싶다. 시는 낯선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한 사냥꾼이 훈련된 매를 데리고 숲속에서 사냥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그는 꿩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그러고 나서 매를 불러 날개가 다친 꿩을 쫓게 했다. 매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매의 발에는 꿩이 들려있지 않았다. 화가 난 사냥꾼이 물었다. "꿩은 어디 있느냐?" 매는 사냥꾼의 어깨에 엎드려 매 특유의 소리를 냈다. "최선을 다해 찾아갔지만, 꿩을 잡지 못했습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꿩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반긴 꿩의 가족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날개를 다친 데다 하늘에서 쫓아오는 매를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니?" 그러자 꿩이 대답했다. "매는 정말 열심히 따라왔어요. 하지만 나는 죽기 살기로 날았거든요!" 무엇을 하여도 어떤 일을 하든지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한다면 우리 안에 감춰진 잠재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계(限界)에 가보지 못했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힘을 쏟는다면 결과의 답은 나와 있다. 인간의 뇌에는 최대 5억 권의 책에 담긴 내용(용량)을 저장할 수 있다고 뇌 과학자는 말한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다. 그렇지만 인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십이 초 동안 시 한 편을 다 읽는 동안 지구상에서는 40명의 사람과 7억 마리의 개미가 탄생 된다. 반대로 십이 초 동안 30명의 사람과 5억 마리의 개미가 지구상에서 죽어가기도 한다. 사람은 포유동물이다. 크기는 1m에서 2m 사이로 다양하며 몸무게는 30kg에서 1백kg 사이다. 임신의 시기는 9개월, 식성은 잡식성이다. 개체 수는 꾸준히 증가하며 70억 이상으로 추산한다. 개미는 곤충이다. 크기는 0.01cm에서 3cm로 다양하다. 무게는 0.001mg에서 1mg 사이다. 산란은 정자의 저장량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식성은 잡식성이다. 개체의 수는 수십억의 10억 배 이상으로 추산한다. 소설 <개미> 작가로 이름을 날린 프랑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흥미로운 분석에 의한 자료다. 작가들은 대중이 생각하지 못한 통계를 생성하므로 작품의 맛을 살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독특한 작가로 어릴 적부터 개미를 방안에 기르며 연구, 관찰하였다. 그리고 결과물로 <개미> 소설을 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밖의 나라에서도 주목받는 소설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허드슨 강가의 이른 아침이다. 산책에서 마주친 백인 여자 하얀 어깨 위에 '愛(애)' 자 문신이 눈길이 간다. 백인 여자는 중국 글씨인 '애' 자를 어깨에 왜 새겼을까? 시도반은 허드슨 강가의 30년 전 백인 여자의 어깨 문신에 의문을 갖는다. 학인은 '애'에 대하여 말한다. '애'는 질문이 많다. '애'는 사랑하는 것이다. 말이 많은 '애', 말수가 적은 '애', 시를 제법 쓰는 문예반 '애'. 우리는 '애' 속에 살고 있다. 재미있는 '애' 말을 한다. 다시 궁금하다. 미모의 백인 여자는 동양의 남자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애' 자를 새긴 30대의 여자는 왜 혼자서 이른 아침 산책을 할까?. 애인은 동양에 있으며 혼자서 고향 뉴욕집에 온 것일까?. 추리는 적절한 답을 못 낸다. 유추, 분명한 것은 동양의 남자와 관련 문신일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 홍콩, 대만 등의 남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아니다. 여자는 언어(言語)를 사랑하므로 한자어인 '애'라는 글자에 애착 있었을 것이다. 선명하게 보이는 어깨 위에 멋으로 새겼을 수도 있다. 언어에 '애(愛)'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상상의 나래일 뿐이다.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운명(運命)론이란 있을까요?" 가을날 산책 중 황금찬 시인의 질문이다. 선생과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돌아본다. 은행나무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긴 수령의 어른 나무다. 첫 번째는 성균관 대학의 은행나무다. 선생은 쌍문동에 살았다. 은행나무가 있는 방학동에는 큰아들이 토속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도반은 선생과 점심을 하면 연산군의 묘 근처 은행나무 아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길 나누었다. "시도반 선생, 이 은행나무가 세 번의 시련이 있었어요"라며 은행나무의 운명론에 관하여 서사(敍事) 한다. 이 나무는 경복궁 증축 때 징목(徵木) 대상의 나무로 베어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대원군에 수차례 간청하였다. 대원군은 마을의 여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은행나무를 징목에서 제외토록 했다. 황금찬 선생은 대원군의 결심이 가상하다 한다. 대원군은 종로구에 있는 석파정을 보고 욕심을 부린 자다. 석파정의 주인은 영의정 지낸 김흥근(金興根)이었다. 대원군은 삼계동정사(三契同精舍 당시 명칭)를 보고 욕심이 났다. 흥정을 넣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꼼수를 부려 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행차케 하여 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종묘, 돌담길 따라가면 순라(巡邏) 길이 나온다. 비원과 연결되는 골목길이다. 조선 시대에 순라군이 궁궐을 지키던 길이다. 초가을 햇빛이 먼 길 떠나는 오동나무 그림자를 잠시나마 쉬게 하고 있다. 길모퉁이 카페는 연인들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신다. 사이에 엄마와 초등학생이 주스를 마신다.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떨어진 오동잎을 주워, 주스 잔 받침으로 놓는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며 오동잎 잔 받침에 미소 짓는다. '오동은 고목이 되어 갈수록 제 중심의 구멍을 기른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지나는 바람 한 줄기 거문고 소리를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 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 칠 수 있다면 텅 빈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복효근 시인은 오동나무의 '고목'을 노래한다.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잎과 넉넉한 품의 잎사귀를 가진 나무다. 오동나무는 중국의 원산인 참오동나무와 울릉도에 고향을 둔 오동나무가 있다. 통꽃 안쪽이 짙은 보랏빛 선이면 참오동나무다. 선이 없는 것이 울릉도 오동나무다. 주변에 만나는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생각 놀이 하나 해볼까 한다. 생각이란 호도처럼 생긴 뇌 속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의 센서다. 그 센서 속의 비밀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도 시시로 바뀌기 때문에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출연했던 박은빈 배우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이라는 것이 '아하 이것이로구나' 정리되는 듯싶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출연하기까지 많은 고민 했어요. 역할의 어려움을 떠나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에 고민하였지요. 과연 연기해도 되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했다고 말한다. 미디어를 통한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것은 현실이다. 박은빈 배우는 '자폐아' 연기를 통한 올바른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필요했다.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배려심이 배우를 망설이게도 했다. 결정의 기간이 1년이 걸렸다. 작품을 마주하는 배우의 진중함에 시(詩)도반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 놀이 한번 해보자는 시도반이 가벼이 여겨졌다. 박은빈은 '무조건적'인 배우의 길을 계속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고도 했다. "현재 시점에서 한 우물을 판 것 같지만, 저는 꼭 이걸 해야겠다든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범방(犯房)에서 온 것 같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지압원을 찾은 학인에게 엄 원장 말이다. 학인은 범방의 뜻을 찾는다.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을 뜻한다. 좀 더 점잖게 이르면 궁중(宮中) 용어쯤으로 알아두자. 시각장애인 엄 원장이 범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선생님! OO를 하다가 허리에 무리가 생겼어요?"라고 말했다면 듣는 사람은 무안하기 이를 데가 없을 수도 있다. 경박한 화법으로 들릴 수 있다. 말이란 듣기에 따라 묵형(墨刑)이 될 수도 있다. 묵형이란 죄인의 살갗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던 조선 시대 형벌을 이른다. 한국의 욕설은 주로 형벌과 관련이 적지 않다. 조선 시대에 죄인을 처벌하던 것들은 중국의 명나라의 대명률에 의한 것들이 많다. 지금의 우리 법률은 독일 헌법에 근거, 기초하지만, 그때는(조선 시대) 그랬다. 예전엔 '제기랄' 이라는 정도도 큰 욕에 속했다. '제기랄'은 '제기다'라는 동사에서 연유한다. '소장(訴狀)이나 원서(願書)에 제사(題辭)를 쓰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제기랄'은 형사 고발을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어이없을 때 사용하는 '젠장'도 순박한 시절엔 욕으로 받았다. "젠장, 꼭 그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슬픔은 없어지진 않는다. 서랍에 넣어지지도 않는다. 슬픔은 곁에 있다. 어느 시인은 슬픔을 서랍에 15분만 넣어두고 싶다는 표현도 한다. 오래된 골목처럼 익숙한 슬픔은 그 골목을 거닐고 있다. 시인이나 철학자가 슬픔의 생김새나 슬픔의 내면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겠다면 그것은 자만일 것이다. 슬픔에 오랜 공부를 한 학인의 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슬픔을 위하여 따라나서는 정도로 보는 것이 겸손일 것이다. 간혹 시를 통하여 슬픔과 고통, 우울증에 서성이는 환자를 치유한다는 직함의 사람도 있다. 명함에는 '시(詩)치유사'라 소개한다. 사실 이 같은 일은 한국 시단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외국에서 '시치유'라는 저서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소 다르다. 심리학을 전공한 시인들이다. 외국에서는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정신치유 의사 자격을 부여한다. 의사와 다름없는 전문적인 정규교육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다소 과장이거나 터무니없다. 의학적인 교육을 수반하지 않는다. 평생교육원과 같은 곳에서 불분명한 민간자격증을 가진다. 시인이 하는 일은 자화상이다. 시를 쓰면서 내 영혼의 생김새는 이런 거고 '내 삶의 풍경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작곡의 영감을 귀뚜라미를 통해 얻기도 했다. '어린이 정경'(1838년)를 비롯한 동요 곡들도 더러 있다. 슈만은 가을이면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작곡하는 것을 즐겨 했다. 공자는 수많은 곤충 중에 귀뚜라미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공자는 제자들과 선학의 시를 편집한다. 시경에는 100여 종 곤충이 등장한다. 시경 국풍 132편, 당나라의 노래(唐風)에선 귀뚜라미(蟋蟀)를 소재로 한 시가 있다. 蟋蟀在堂(실솔재당)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歲聿其莫(세율기모) 해가 드디어 저물었구나. 今我不樂(금아불락) 이제 우리가 즐거워하지 않으면 日月其除(일월기제) 해와 달은 가버린다. 無已大康(무이태강) 너무 편안하지 아니한가 職思其居(직사기거)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여 好樂無荒(호락무황) 좋고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음이 良士瞿瞿(양사구구) 어진 선비가 조심할 내용을 담는다. 풀이하면 귀뚜라미가 처서를 맞아 집안으로 들어오면 한 해가 저문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게으름 피우지 말고 겨울 준비를 하자. 옷깃을 여미며 얌전하게 올바른 마음가짐을 해서 한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가을 전어에 깻잎 생각납니다." 영국으로 떠난 후배 시인의 편지다. 텃밭의 깻잎을 갓 따왔다. 전어회를 된장에 싸 먹었다. 입안은 한동안 알싸함이 남아 있다. 깻잎의 향기가 어떻게 진동을 하는지 영국까지 따라왔다 한다. 신안 부두, 정자 식당에서 마셨던 토속 막걸리도 생각이 나서 날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한다. "선배님! 48장의 추억이 생각나세요." 시(詩) 도반은 무슨 말인가 편지를 들여다본다. 화투 이야기다. 화투는 꽃 싸움이다. 매화, 난초, 솔, 벚꽃, 모란, 국화, 오동 따위의 열두 가지 그림이 각 네 장씩 나온다. "땡잡았다"는 말은 화투의 노름판에서 상당히 높은 끗수에 해당하며 상대방을 크게 이긴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라 한다. 시 도반은 화투가 48장이라는 것을 한 번도 기억 속에 담아 둔 적 없다. 그저 화투려니 하고 대했다. 영국의 김 시인은 화투의 역사까지를 기억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전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략 조선 후기쯤, 1902년 황성신문에 실린 잡학 광고에 화투가 나왔다고 한다. 어림 120년의 역사를 가졌다. '라스트 레시피(Last Recipe: Memory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없다'는 뜻의 '공전절후(空前絶後)'라는 말이 있다. 비교할만한 것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는 의미도 지닌다. 주로 영화 선전에 이용된 말이다. '공전의 히트'라는 문구와 같은 것들이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공전절후’에 흥행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더한 부류도 있다. 언어의 건축자인 시인이다. 시(詩) 도반은 바람에 언덕에서 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에게 '공전절후'의 시인이라 불러주고 싶다. 1980년대 바람의 시인으로 시, 동시, 종교시, 논설문에 이르러 계관시인 후보에 오른 천상시인이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나도 너도 볼 수 없었지/ 그러나 나뭇잎이 매달려 떨고 있을 때/ 바람은 가로질러 가고 있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너도나도 볼 수 없었지/ 그러나 나무들이 머리 숙여 인사할 때/ 바람은 지나간다//' 크리스티나 로제티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시 전문이다. 1830년 12월에 태어나 1894년 12월에 독신으로 살다간 영국이 내세우는 여류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는 눈보라 치는 12월에 태어나 눈보라 치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詩)도반은 故 황금찬 선생과 우이동, 한마을에 살면서 행사장 동행이 잦았다. 비 내리는 여름날이다. 이탄 시인, 황금찬 선생과 한국기독교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청주 동행이었다. 황금찬 선생은 평소 유머가 많다. 문인들의 여자관계도 구수하게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야기 끝에는 "내가 본 것이 아니에요. 들은 이야기에요"라며 마무리한다. 이야기가 끝났다 싶은데 한참 후 다시 강조한다. "시도반 선생, 내가 목격을 한 것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입니다"라고 다시 못 박음질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참을 웃곤 했다. 이야기 중 이탄 선생이 한 달에 한두 번은 고스톱을 치는 것이 낙(樂)이라 한다. 황 선생은 시인이 고스톱을 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당부한다. 황 선생은 교회 장로다. 이탄 선생은 정년 후 유일한 낙이라며 웃는다. 청주 가는 길은 멀었다. 황 선생은 시집을 펴내며 제목에 신경이 쓰인다는 화두를 꺼낸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짐승과 식물의 이름을 짓는 것에 신경이 크게 쓰였을 것이라 한다. 선생은 악기 중에 가장 퇴폐적인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말이 없자 '섹소폰'이라 한다. 교회 연주에 사용하지 않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몸을 비빈다. 서걱서걱 소리다. 순정으로 전신을 비비는 억새, 폭풍우에도 초연하다. 푸른 피를 비비는 억새는 푸른색을 걸고 신과의 특별한 언약이 있었던 것일까. 가느다란 허리에 서로서로 껴안고 바람불어 흔들릴 뿐, 넘어지지 않는다. 기대는 사랑이 무섭다. 손 베일 것은 날카로운 잎새도 진실로 껴안으면 베이지 않는다. 마치 정신을 살리는 선비와 같다. 억새와 꽃들이 지구를 살리고 있다. 어제는 꽃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별을 보았다. 내일은 바람을 만날 것이다. 억새와 눈빛과의 약속은 사뿐사뿐 낡아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 독일 문학에 노발리스(Novalis, 1772~1801)가 쓴 장편 소설 '푸른 꽃'(집필도 중 작가는 요절, 미완의 작품)이 있다. 스무 살 청년 하인리히는 꿈에서 푸른 꽃을 보게 된다. 그가 푸른 꽃으로 다가서자 꽃이 상냥한 여자로 변한다. 그 소녀를 동경한 하인리히는 꿈에서 깨어나 여자를 찾아 먼 여행길을 떠난다.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크링스오르를 만나고, 그의 딸 마틸데를 보자 꿈에서 본 푸른 꽃의 모습이라 좋아한다. 그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꿈을 꾼다. 나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