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꽃은 말이 없지만 시인은 그 침묵에서 말을 듣는다. 새의 노래에서는 바람의 언어를, 나비의 날갯짓에서는 먼 곳에서 온 전언을, 뜨거운 연못 위 수련에서는 고통을 견디며 피어나는 존재의 존엄을 읽는다. 사라지는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 한순간의 기억까지도 놓치지 않고 시의 언어로 불러 세운다.
안서경 시인의 신작 시집 <바람의 입술을 베다>(서정시학, 2026년 8월)는 화려한 수사나 문단의 유행을 좇기보다 자연과 일상을 오래 응시하면서 그 안에 숨은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린 서정시집이다.
4부로 구성된 시집에는 자연과 인간, 시간과 기억, 사랑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깊은 사유가 고요하게 흐른다.
자연을 읽고, 삶을 읽고, 존재를 읽다
안서경의 시에서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자연은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하나의 존재이며, 시인은 그 말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다.
'새들의 말'에서 새들의 노래는 '바람의 언어'가 되고 꽃은 '숨은 방언'을 가진 존재가 된다.
"아침마다 새들의 노래는
바람의 언어
꽃들의 숨은 방언"
새와 꽃의 말을 직접 알아들을 수 없기에 시인은 더욱 오래 바라보고 귀 기울인다. 그리고 바람의 시라고 생각하는 순간 새의 노랫말이 들리고 꽃의 투정까지 눈치채게 된다.
시인은 마지막에 "그것이 노래가 되고 시로 맺힌다"고 말한다. 자연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지적한 "언어와 언어 너머의 긴장과 결속"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안서경의 시는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현존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고, 그 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예술적으로 심화한다.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그의 시를 두고 "뽐내지 않고, 멋 부리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시적 사유를 진솔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잡초 속에 숨어 핀 외로운 한 송이 백합”에 비유한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오래 마음에 남는 서정. 그것이 안서경 시의 중요한 미학이다.
목차를 따라가는 네 개의 시적 풍경
<바람의 입술을 베다>는 1부 '여우비 다녀가다', 2부 '눈꽃전송', 3부 '수련을 읽다', 4부 '채플힐 블루'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부는 각각 독립된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자연 → 일상 → 존재 → 기억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적 여정을 이룬다.
1부|여우비 다녀가다… 새와 꽃, 바람이 들려주는 생의 첫 목소리
'새들의 말', '여운', '나비의 전언', '봄날 한 컷', '한통속', '꽃의 환', '동행', '여우비 다녀가다', '멍 때리기 좋은 날', '잔소리', '들고 난 자리', '홀로 나는 새', '그러다 꽃눈 도진다', '새에 부치다', '멍텅구리 석등', '두물머리에 머물다', '채비', '봄, 석촌호수', '입춘, 경의중앙선' 등이 수록됐다.
1부의 출발점은 자연이다. 그러나 이 자연은 정적인 풍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말을 건넨다.
'나비의 전언'에서는 모시흰나비가 시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나비가 혹시 천사의 영혼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그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 나비 되어
먼 길 찾아와 주었다 그리 여길게"
자연과 인간, 현실과 초월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두물머리에 머물다', '봄, 석촌호수', '입춘, 경의중앙선'에서는 자연과 도시가 함께 시의 무대가 된다. 일상의 공간도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하나의 서정적 장소로 변한다.
1부는 그렇게 세상의 작은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시인의 첫 번째 시적 감각을 보여준다.
2부|눈꽃전송… 계절과 일상 사이에서 깊어지는 사유
'바람의 무늬', '스쳐 지난 후', '게으른 하루', '망개나무, 지나치게 말똥한', '매운 것들', '서창에 기대어', '곶감이 익는 시간', '응결', '눈꽃전송', '늦게 당도한 손님', '묵언동백', '유혹', '시와 라면 사이', '지하철 타고 화장하는 여자', '대낮에도 별은 뜨고', '삼중도어시스템', '오늘의 미세먼지 농도', '쥐똥나무가 쥐똥나무인 사연', '풍등' 등이 이어진다.
2부에서는 자연의 감각이 인간의 생활과 만나면서 시적 사유가 더욱 깊어진다.
특히 '서창에 기대어'는 이 시집의 철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서창으로 서걱서걱 스치는 대나무 잎의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그것을 한 생이 살아가는 발자국소리처럼 받아들인다.
오세영 시인이 이 작품을 특별히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의 소리가 곧 삶의 소리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곶감이 익는 시간'은 기다림과 숙성의 의미를, '응결'과 '눈꽃전송'은 계절과 기억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반면 '시와 라면 사이'나 '지하철 타고 화장하는 여자'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인간적인 온기를 불러온다.
특히 '지하철 타고 화장하는 여자'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도 능숙하게 화장을 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어느 역에서 하차하게 되더라도
내내 꽃길만 같아라"
관찰에서 시작한 시가 결국 따뜻한 축복으로 끝난다. 안서경 시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다정한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3부|수련을 읽다… 꽃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읽는 일
3부에는 '바람의 입술을 베다', '문빔', '수레국화', '수선화', '질경이꽃', '달맞이꽃', '제비꽃', '꿀풀', '강아지풀', '바람꽃', '탱자', '사랑초', '복수초', '흰 민들레', '수수꽃다리', '꽃의 기억', '꽃들의 안부', '겨울 동백꽃', '수련을 읽다'가 수록됐다.
시집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3부에서는 다양한 꽃들이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안서경은 꽃을 식물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꽃을 통해 삶을 읽고, 꽃의 표정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는다.
표제작 '바람의 입술을 베다'는 이러한 시적 세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단아하지나 말든가
올곧게 꽃대 올려
하고픈 말이 무언지"
그리고 마지막에,
"지나던 바람도 선연히
입술
베인다"
꽃무릇의 선연한 붉음이 바람의 입술을 베어버린다는 표현은 아름다움과 상처를 동시에 품는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꽃을 흔들고, 꽃은 말하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언어를 발견한다.
3부에 질경이꽃, 꿀풀, 강아지풀, 흰 민들레처럼 작고 소박한 꽃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의미가 깊다.
이는 오세영 시인이 말한 ‘잡초 속에 숨어 핀 백합’의 미학과 닿아 있다.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고 낮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는 것, 쉽게 지나치는 것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안서경 시의 힘이다.
'수련을 읽다'에서는 이 시적 태도가 더욱 선명해진다.
폭염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연못에서 수련 한 송이가 말갛게 피어난다.
"애끓는 열탕 한가운데서 어찌 견디었나"
시인은 꽃을 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꽃이 어떻게 견디고 피어났는가를 묻는다.
수련은 결국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며 피어나는 존재의 은유가 된다.
4부|채플힐 블루… 이국의 풍경에서 되살아난 기억과 고독
4부에는 '머나먼 그곳', '레드로빈', '오, 매그놀리아', '글로리아, 당신', '휘파람새', '비숍은 알까', '부활절과 산딸나무', '차이.1', '차이.2', '시절, 시절들', '사라가든', '늦은 후회', '미세스 바릴라네 텃밭', '윌밍턴 비치에서', '오래된 찻집의 고독', '할로윈', '겨울 풍경', '콘서트가 끝나고', '응달의 눈은 한참을 그대로였다', '채플힐 블루'가 실렸다.
장기간 미국 뉴저지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생활한 시인의 경험이 집약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여행시와는 다르다. 미국의 자연과 사람, 거리와 바다, 꽃과 새는 결국 시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레드로빈'이다.
채플힐의 풍경 속으로 날아든 다홍빛 새와 갈색 다람쥐를 바라보며 시인은 찰나의 순간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펜이 없다. 결국 남은 것은 ‘찰나의 눈도장’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
먼 훗날 망각의 강을 이룬다"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은 사라진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사라지는 순간을 시로 붙잡는다.
따라서 4부는 미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시간과 기억, 고독과 귀환에 대한 내면의 기록이다.
대표작이 보여주는 안서경의 시 세계
<바람의 입술을 베다>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자연, 찰나, 기억, 사랑, 존재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꽃을 바라보는 일은 자연을 보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일이며, 지나는 새를 바라보는 일은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는 일이다.
나비의 날갯짓은 전언이 되고, 바람은 언어가 되며, 꽃은 기억이 된다.
안서경의 시는 보이는 세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읽어내는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가 "언어와 언어 너머의 긴장과 결속에서 발원하는 세계"라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의 시에서 감각은 사유로 이어지고, 사유는 다시 정서로 돌아온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독자는 자연을 읽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읽게 된다.

안서경 시인은 1963년 경남 김해 진영에서 태어나 진주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김춘수 시인의 추천을 받았다. 당시에는 본명 안경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리운 저녁>, <유독 그곳만 환한 볕마루>를 펴냈으며, 장기간 미국 뉴저지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거주했다. 현재는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현대시인협회, 경기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회 송파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안서경 시인의 문학적 이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축적된 경험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공간의 이동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다. 낯선 풍경은 기억을 불러오고, 기억은 다시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들꽃과 양평의 자연, 채플힐의 새와 바다, 일상의 사람과 오래된 기억이 하나의 서정적 세계 안에서 만나는 이유다.
AI 시대에도 묵묵히 나의 길을 가다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시인의 말’은 <바람의 입술을 베다>의 문학적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안서경은 지나간 자리에는 눈에 띄지 않는 흔적이 남고, 그 작은 조각들이 모여 언어의 집을 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AI가 창작의 영역까지 빠르게 들어오는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AI가 치고 드는 시대에
얼마나 더 시라는 이름으로
밤새워 썼다 지웠다 할 수 있을지"
그러나 결론은 담담하다.
"지금껏 걸어왔던 것처럼
나만의 길 묵묵히 가는 수밖에"
이 말은 오늘날 문학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AI가 빠르게 문장을 생산할 수 있는 시대일수록 인간 시인의 감각과 기억, 경험과 진정성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자신만이 바라본 한순간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다.
그것은 단순한 문장 생산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시가 남는다
바람은 붙잡을 수 없다. 꽃을 흔들고, 나뭇잎을 스치고, 새의 노래를 싣고 지나간다.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시인은 그 흔들림을 기억한다.
꽃무릇의 선연한 얼굴에 베인 바람의 입술, 모시흰나비의 날갯짓, 뜨거운 연못에서 피어난 수련, 채플힐의 풍경 속으로 사라진 레드로빈,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마치는 한 여인의 모습까지.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이 안서경에게는 모두 시의 씨앗이다. 그 씨앗은 기억 속에서 자라고, 언어가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바람의 입술을 베다>는 꽃에 관한 시집이면서 동시에 시간에 관한 시집이고, 기억에 관한 시집이며, 인간 존재와 사랑에 관한 시집이다.
무엇보다 이 시집에는 세상의 작은 것들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마음이 있다.
오세영 시인이 '잡초 속에 숨어 핀 외로운 백합'이라 표현한 것처럼, 안서경의 시는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다. 조용히 피어나고, 조용히 흔들리고, 조용히 독자의 마음에 들어온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주변의 작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 한 줄기,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새 한 마리,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까지.
어쩌면 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순간에 잠시 멈춰 서서, 그 안에 숨어 있던 삶의 목소리를 듣는 것.
안서경 시인은 그 오래된 시인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AI가 문장을 만들어내는 시대에도 자신의 기억과 감각,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다.
바람은 지나가지만 시는 남는다. 그리고 바람의 입술에 베인 작은 상처에서, 한 편의 시가 오래도록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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