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역사적 유산인 근우회(槿友會)의 정신을 계승해 가부장적 권력정치를 넘어 성평등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15일 발표한 광복절 성명을 통해 "광복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날이지만, 해방의 역사는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의 역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민족적 억압과 계급적 착취, 성차별이라는 중층적인 억압에 맞서 싸우며 해방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밝혔다.
성명은 특히 1927년 창립된 근우회를 오늘날 성평등 민주주의가 되새겨야 할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제시했다.
1927년 근우회,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함께 외치다
근우회는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역량을 결집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여성들이 함께 참여한 전국적 여성운동 조직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당시 여성들이 식민지 지배뿐 아니라 조선 사회 내부의 봉건적·가부장적 질서와도 맞서야 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농촌 여성과 가사사용인이 겪었던 차별 등 당시 여성들이 경험한 현실을 지적하며, 여성들은 독립운동의 주변부가 아니라 노동과 생존, 교육과 결혼, 자기결정권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운 해방의 주체였다고 강조했다.
근우회가 1929년 채택한 행동강령도 성명의 주요 근거로 제시됐다.
당시 근우회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와 봉건적 인습 타파, 조혼 폐지와 결혼의 자유, 인신매매와 공창 폐지 등을 요구했다.
또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고 여성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와 산전·산후 임금 보장, 여성 및 소년 노동자의 위험 노동과 야간 노동 폐지 등을 주장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러한 요구가 약 1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다.
"100년 전의 요구, 오늘의 기본권"
성명은 평등하게 일할 권리와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결혼과 이혼의 자유, 안전하게 일할 권리, 돌봄과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 등이 과거에만 머무는 의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것은 오늘도 성평등 민주주의가 실현해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밝혔다.
광복 이후 한국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큰 변화를 이뤘지만, 여성에게 민주주의의 성과가 동등하게 배분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단체의 지적이다.
여성 노동자와 여성운동가들은 노동현장과 지역사회, 교육, 시민운동, 민주화운동 등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왔지만, 정치와 국가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구조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주장이다.
"누구의 민주주의였는가" 질문 던져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성명에서 민주화의 성취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누구의*민주주의였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대표되었는가. 누가 권력을 가졌고, 누가 그 권력의 결정에서 배제되었는가"라고 되물었다.
광복이 단순히 식민지 지배의 종식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민주주의 역시 선거와 정권교체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명은 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권력, 성별에 따른 노동과 임금의 불평등, 돌봄을 여성에게 집중시키는 사회구조, 여성의 몸과 성을 통제하려는 정치, 여성의 대표성을 주변화하는 제도와 관행 등을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단체는 "근우회의 여성들이 제국주의와 봉건적 억압에 동시에 맞섰듯이 오늘 우리는 성차별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모든 권력구조에 맞선다”며 “여성의 해방을 민주주의의 부차적인 의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완성 조건으로 선언한다"고 밝혔다.
평등한 노동권·성적 자기결정권·정치적 대표성 요구
성명에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도 담겼다.
우선 성별에 따른 임금과 고용 차별을 철폐하고 노동과 돌봄의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는 평등한 노동권을 요구했다.
또 여성의 몸과 삶을 국가와 정치권력, 종교와 가부장적 규범이 통제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결혼과 가족의 영역에서도 성별과 가족 형태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영역에서는 여성이 권력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모든 성별의 시민이 동등하게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성평등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근우회가 완성된 세상을 물려받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근우회 여성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차별과 억압에 맞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근우회의 역사적 의미가 완벽한 조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해방을 하나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민족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 노동의 해방을 연결해 사고했다는 데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해방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보다 넓게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민족의 해방에서 여성의 해방으로, 모두의 해방으로"
성명은 광복을 과거의 기념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해방의 약속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근우회 여성 선배들이 제기했던 평등노동권, 결혼과 가족의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 차별 철폐의 요구를 오늘의 언어와 정치로 이어가겠다”며 “가부장적 권력정치를 넘어 여성의 삶을 중심에 두고 모든 시민의 존엄과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성명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광복절의 의미와 성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압축했다.
"민족의 해방에서 여성의 해방으로, 여성의 해방에서 모두의 해방으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성평등 민주주의의 길을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광복은 81년 전 끝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약속이다.
식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모든 억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우회의 여성들이 보여준 것은 해방이란 하나의 문을 여는 일이 아니라 누구도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 갇히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늘의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투표할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넘어 노동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돌봄의 자리에서, 그리고 권력을 결정하는 테이블에서 모든 시민의 존엄과 평등이 보장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삶의 언어가 된다.
81년 전 광복의 함성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결국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누구의 해방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는가.
근우회가 남긴 '해방의 확장'이라는 정신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특정 성별만의 해방이 아니라 여성의 해방에서 모두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성평등 민주주의가 놓여 있다.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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