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반세기 넘게 국가폭력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회에 다시 한번 정의의 문을 열어 달라고 호소했다.
(사)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은 14일 성명을 내고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비롯한 과거사 관련 법안의 국회 본회의 조속 상정과 통과를 촉구했다.
단체는 성명에서 "긴급조치 피해자들은 이미 반세기 넘게 정의를 기다려 왔다"며 "더 이상의 지연은 또 다른 정의의 유예이며 피해자들에게 또 한 번의 고통을 강요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번 성명은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법적·입법적 구제의 필요성을 다시 제기하면서, 판례 변경으로 국가배상의 길이 열린 피해자와 그 이전에 확정판결을 받아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 사이의 형평성 문제를 국회가 입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다.
대법원 2022년 판결, 긴급조치 제9호 국가배상책임 인정
논란의 중심에는 1970년대 유신체제 당시 발령된 긴급조치 제9호와 이에 따른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2년 8월 30일 선고한 2018다212610 사건에서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에 대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제9호가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그 적용·집행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적용·집행에 관한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했던 종전 판례의 견해를 변경했다.
이에 따라 판례 변경 이후 소송을 진행한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받을 가능성이 열렸지만, 판례가 변경되기 전에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은 기존 민사소송법상 재심 사유만으로는 동일한 구제를 받기 어려운 문제가 남았다.
이번 특별법은 바로 이 지점을 입법적으로 보완하려는 취지다.
특별법, 판례 변경 전 확정패소 피해자에게 민사재심 길 열어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등에 관한 특별법안'은 박주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의안번호 2203490으로 2024년 9월 2일 발의됐으며, 115명의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국회 의안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를 거쳐 2025년 12월 19일 본회의 심의 대상으로 회부됐으며, 현재 본회의 표결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법안의 핵심은 대법원의 2022년 8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 이전에 긴급조치 피해와 관련한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각하 또는 기각의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일정 요건 아래 특별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는 2025년 12월 16일 해당 법안을 의결했으며, 법안에는 형사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는지 여부 등과 관계없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함께 특별재심 및 국가배상청구 기간을 법 시행일부터 3년으로 제한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후 12월 18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도 법안이 수정가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본회의 처리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같은 피해자인데 소송 시점에 따라 구제 여부 달라져"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핵심은 판례 변경 전후에 따라 국가배상 여부가 달라지는 형평성 문제다.
같은 긴급조치로 피해를 입었더라도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언제 제기했고, 해당 소송이 판례 변경 시점 이전에 확정됐는지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체는 성명에서 이를 "정의와 형평의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현실"이라고 지적하면서, 특별법이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입법 조치라고 주장했다.
특히 잘못된 법리에 따라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한 피해자들에게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202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취지를 실질적으로 완성하는 입법이라는 입장이다.
과거사 관련 법안도 함께 처리 촉구
단체는 긴급조치 피해자 특별법뿐만 아니라 국회에 계류 중인 다른 과거사 관련 법안들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성명에는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등이 함께 언급됐다.
다만 5·18 관련 법안의 경우 여러 개정안이 각각 다른 내용과 심사 절차를 거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12월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를 보상 대상으로 명시하는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따르면 해당 개정법률은 2026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또한 2025년 12월과 2026년에도 5·18 관련자 보상과 민주유공자 예우 등을 둘러싼 여러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심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성명은 개별 법안의 내용과 처리 단계가 서로 다르더라도, 국가폭력과 민주주의 훼손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명예와 권리를 회복한다는 큰 틀에서 과거사 관련 입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로 풀이된다.
"피해자의 인권은 사건 종류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호돼서는 안 돼"
단체는 최근 국회의 정치적 대립으로 본회의에 부의된 여러 법안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거론하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까지 정치적 현안에 밀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성명은 형사소송법 개정 등에서 피해자 인권 보호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과거 잘못된 판례로 오랜 기간 권리를 제한받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에도 같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의 인권은 사건의 종류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단체의 주장이다.
이는 과거사 문제를 특정 정치세력이나 특정 시대에 대한 평가의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잘못된 공권력 행사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다할 것인가라는 헌법적·법치주의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민주주의는 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실천으로 증명"
단체는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해 온 정치권에도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했다.
성명은 "민주주의는 말이 아니라 책임 있는 실천으로 증명된다"며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명예 회복과 권리 구제를 더 이상 후순위로 미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이미 수십 년 동안 사법적 판단과 국가의 조치를 기다려왔다는 점에서, 입법을 통한 구제 역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 단체의 입장이다.
대법원이 2022년 판결을 통해 긴급조치 제9호와 관련한 국가배상책임의 법리를 변경한 만큼, 그 이전 확정판결로 인해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어떤 제도적 구제 수단을 마련할 것인지는 입법부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 국회가 결단해야 한다"
(사)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은 성명 말미에서 국회가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등에 관한 특별법안'을 비롯한 과거사 관련 법안을 조속히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해 줄 것을 거듭 촉구했다.
단체는 이를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대한민국이 정의와 법치, 민주주의 위에 서 있는 국가임을 국민 앞에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사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에 머무르기 위한 일이 아니다.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 인정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어떻게 회복시키느냐는 현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202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과 적용·집행에 관한 국가작용의 위법성을 인정하고 국가배상책임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판례 변경 이전 확정판결이라는 절차적 장벽 앞에 선 피해자들에게는 여전히 입법적 해결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가 있다.
정의는 판결문 한 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판결의 취지가 피해자의 삶 속에서 실제로 구현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반세기를 기다린 피해자들에게 또다시 기다림을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고 책임의 문을 열 것인지.
국회의 선택이 대한민국의 법치와 민주주의가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고 치유하는지를 보여줄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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