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어머니를 잃고 난 뒤 비로소 들리는 말들이 있다. 살아생전에는 일상이었던 말투와 손길, 부엌의 냄새와 고향의 방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한 시어가 된다.
학유(鶴遊) 신순임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엄마를, 복사하다>(문학의숲)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세상을 먼저 떠난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어머니를 넘어 한 시대를 견디며 가족을 지켜낸 모든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사모곡이다.
신순임 시인은 이번 시집의 머리글에서 어머니를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 사람"으로 표현한다.
"일평생 여름 휴가 한번 가보지 못한 엄마는 버킷리스트로 여름 여행을 꼽으셨던 걸까."
생전에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이어 "총명도 무딘 붓끝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시인은 끝내 붓을 들어 이별을 견디고, 내세에서도 다시 모녀로 만나기를 소망한다.
이 시인의 말은 이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차례로 읽는 '엄마'의 생애
<엄마를, 복사하다>는 모두 6부로 구성됐다.
제1부 '하늘문 열리는 날에'는 어머니의 기일과 제사, 남겨진 가족의 일상을 통해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았다.
제2부 '퍼르르'에서는 박주가리, 난젓, 파짠지, 호박범벅, 사과고추장 등 음식과 들꽃, 계절을 통해 엄마의 손맛과 생활의 지혜를 복원한다.
제3부 '엄마를, 복사하다'는 이번 시집의 중심축이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세대를 넘어 딸에게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제4부 '다, 부질없구나'는 삶과 죽음, 종교와 후회, 가족사를 성찰하며 인간 존재를 깊이 응시한다.
제5부 '청송 가는 길'은 시인의 고향 청송과 친정, 효 문화, 옛 마을 풍경을 통해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한다.
마지막 제6부는 산문 '엄마별을 바라보며'와 '사라진 동은당'으로 마무리하며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고록 같은 울림을 전한다.
표제작 '엄마를, 복사하다'가 전하는 울림
이번 시집의 백미는 단연 표제작 '엄마를, 복사하다'다.
시인은 어느 날 우연히 읽은 "허리는 자식들에게 바친 희생 봉"이라는 문장에서 어머니의 생애를 떠올린다.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조금이라도 더 퍼주고, 더 챙겨주려 했던 손길.
그 희생을 보며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아이들에게 같은 손길을 내미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연히 본 문장
"허리는 자식들에게 바친 희생 봉"
감정 용강로에서 녹아 사모곡 태운다
바삐 보낸 청춘 발표되어
본의 아니게 기대었다가 마주할 생채기
오래 두지 않으려 마음 다스리기 연습하며
까틀막진 희생 봉 쳐다보기 거북해
미안함에 더한 안쓰러움이
작은 통증마저 그냥 건너가길 기도하지만
퍼내기에 여념 없는 손길 쉴 줄 몰라
곁눈으로 쳐다보기도 민망하다
듣고 보고 배운 것은 정확해
손길 노는 법 모르니
"외할매 같다"는 아이들 말에
절대 희생 봉만큼은 높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무심결에 엄마를 복사한다
더 주고 싶어서
- '엄마를, 복사하다' 전문
"무심결에 ' 엄마를 복사한다
더 주고 싶어서"
짧은 마지막 두 행은 이 시집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엄마는 유전으로만 이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사랑의 언어로 복사되는 존재임을 시인은 담담하게 고백한다.
'엄마'는 한 사람을 넘어 한 시대의 이름
이 시집에서 '엄마'는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니다.
가난한 시대를 견디며 자식을 키워낸 한국 어머니들의 초상이며, 이름보다 '누구의 엄마'로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역사다.
파짠지와 난젓, 호박범벅 같은 소박한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가족을 살려낸 생존의 기억이고, 방언은 고향의 문화와 공동체를 이어주는 언어유산으로 되살아난다.
시인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일이 곧 고향을 기억하는 일이며, 친정을 기억하는 일이고, 사라져가는 생활문화를 붙드는 일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엄마를, 복사하다>는 개인의 추모시집을 넘어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구술사를 시로 기록한 작품집이라 할 만하다.

학유(鶴遊) 신순임 시인은 1966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2011년 월간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사)국제PEN한국본부, (사)한국산림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앞서 <무첨당의 오월>, <앵두세례>, <양동물봉골 이야기 1, 2>, <친정나들이 1, 2>, <탱자가 익어갈 때> 등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다.
현재는 경주 양동마을 고택 무첨당(無添堂)의 안주인으로 전통문화를 지키며 고택을 스케치하고, 고향 방언을 연구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생활문화, 방언을 시의 언어로 승화시켜 온 그의 작품 세계는 이번 여덟 번째 시집에서 한층 깊어진 모성과 생명의 철학으로 확장되고 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딸은 여전히 어머니의 말투로 아이를 부르고, 어머니의 손맛으로 음식을 만들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품는다.
결국 '엄마를, 복사한다'는 것은 얼굴을 닮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을 닮아가는 일이다.
신순임 시인의 제8시집 <엄마를, 복사하다>는 한 권의 시집을 넘어, 이 땅의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는 늦은 감사장이며,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모든 자녀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문학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가장 깊은 시이며, 삶을 끝까지 밝혀주는 영원한 등불임을 이 시집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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