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어떤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세월이 깊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움은 기억을 붙들고, 기억은 결국 한 권의 시집이 된다.
1980~90년대 대한민국 팝음악의 길잡이였던 전설의 DJ 김광한이 세상을 떠난 지 11년.
그의 아내 최경순 시인이 펴낸 시집 <그립다는 말 대신>(창해)은 사별의 아픔을 견디며 써 내려간 사랑의 기록이자, 삶과 죽음을 넘어 이어지는 헌사이다.
남편이 평생 다정하게 불러주던 애칭 '꽃님이'.
그 한마디 호칭은 이제 88편의 시가 되어 독자 앞에 다시 피어난다.
이 시집은 단순한 추모시집이 아니다.
한 사람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어떻게 문학으로 승화되고, 상실의 시간이 어떻게 치유의 언어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록이다.
시집이 들려주는 '그리움의 문학'
<그립다는 말 대신>은 모두 5부, 88편의 시로 구성됐다.
1부 '바라보다', 2부 '그립다는 말 대신', 3부 '비우지 못한 잔', 4부 '가을로 가는 기차', 5부 '음악과 꽃님이'.
시인은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비유를 앞세우지 않는다.
짧고 담백한 언어로 슬픔을 응시하고, 사랑을 기억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리움의 결을 한 올 한 올 길어 올린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는 이를 울리기보다 조용히 스며든다.
그립다는 말보다 더 깊은 언어
시집의 표제작 '그립다는 말 대신' 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수천 개 바늘에 찔려
정신이 혼미했다
그대 떠난 뒤 많이 추웠다
더운 날에도 가슴 시린 채
얼음 한 덩이 품고 살았다
슬픔이 전염되고
외로움에 젖어들어
독감으로 찾아온 당신
- '그립다는 말 대신' 전문
이 시에는 거창한 비유도, 화려한 표현도 없다.
그러나 "더운 날에도 얼음 한 덩이를 품고 살았다"는 한 줄만으로도 상실의 온도를 독자는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슬픔은 설명할수록 옅어지지만, 이 시는 절제된 언어로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일상에서 피어난 사별의 슬픔
대표작 '반창고' 는 더욱 일상적이다.
과일을 자르다 손을 베고, 밴드를 붙이다 눈물이 나는 평범한 하루. 그 작은 장면 하나가 깊은 상실로 이어진다.
과일을 자르다가
손을 베었다
밴드를 붙이는데
눈물이 난다
상처 난 마음에 붙일
반창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보다 더 깊은
그리움 달래줄
반창고 하나 있었으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대 생각을 붙인다
- '반창고' 전문
사별의 슬픔은 특별한 날보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 속에서 더 선명하게 찾아온다.
최경순 시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래서 그의 시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그리움은 숲이 된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는 '그대의 숲' 이다.
생각날 때마다
한 그루씩 심었습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자작나무, 소나무
그리울 때마다
단풍나무, 은행나무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느티나무, 대나무
어느새 숲이 되었습니다
그대가 되었습니다
- '그대의 숲' 전문
생각과 보고 싶은 마음, 그리움과 추억을 각각 다른 나무에 빗댄 발상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한 사람을 향한 기억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숲이 되고, 결국 그 숲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은 이 시집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은유라 할 만하다.
가장 먹먹한 시, '전화번호'
시집에서 가장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은 '전화번호' 다.
남편의 휴대전화로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 스스로 전화를 받는 장면.
그 짧은 설정 하나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은 무너진다.
"응, 나야."
"뭐 해?"
"당신 생각."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법한 장면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번호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현실은 비로소 이별을 받아들이게 한다.
"고맙다, 야속하다. 야속하다, 고맙다."
이 마지막 반복은 시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슬픔을 넘어 치유로
<그립다는 말 대신>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독자는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 오래 그리워한 사람이 있는 사람, 아직도 마음속에서 보내지 못한 이름 하나를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 것이다.
이 시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절망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실을 끌어안고도 다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의 용기, 그것이 최경순 시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DJ 대통령' 김광한, 한 시대를 노래하다
故 김광한(1946~2015)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65년 첫 방송 마이크를 잡은 이후 KBS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한민국 팝음악 문화의 지평을 넓힌 주인공이다.
마이클 잭슨, 퀸, 마돈나, 듀란 듀란, 아하, 엘튼 존, 엘비스 프레슬리….
세계적인 팝스타들의 음악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그는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음악과 문화를 소개하며 수많은 청춘들의 감성을 일깨웠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었다.
공테이프를 준비해 라디오 앞에서 녹음 버튼을 누르던 청소년들, 정성껏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엽서를 보내던 청취자들…
그들의 청춘 한가운데에는 늘 김광한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DJ 대통령'이라 불렀다.
그는 단순히 음악을 들려준 진행자가 아니라, 음악으로 시대와 사람을 이어준 문화 전도사였다.
생전 평생 모은 음반과 희귀 서적, 방송 자료를 전북 완주군에 기증한 것도 그런 문화적 소명의 연장선이었다. 완주군은 이를 바탕으로 '전설의 DJ 김광한 팝송전'을 개최하는 등 그의 유산을 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제 그의 삶은 라디오 전파를 넘어 문학 속에서도 다시 살아 숨 쉬고 있다.

최경순 시인, 사랑을 시가 되게 한 사람
최경순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문예사조>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인이면서 번역가이고 여행작가이며,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문학과 사진, 여행을 넘나드는 폭넓은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 번역서로는 <내가 나에게 돌아가는 여행>, <품위 있게 평화롭게, 세상과 이별하는 방법>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김광한 DJ의 자서전 <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을 정리해 출간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독자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최경순은 시인 이전에 '아내'이다.
한 사람을 평생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랑이 결국 그녀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꽃님아, 우리 영국에 다녀오자"시집의 첫 장을 펼치면 독자는 '여는 글'에서 멈춰 서게 된다.
"꽃님아, 우리 영국에 다녀오자. 리버풀에 가서 존 레넌 만나고 매튜 스트리트 캐번 클럽에서 비틀스 노래 들어보자."
그것은 남편 김광한이 남긴 마지막 약속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꽃님아"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던 사람.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불러주며 청혼했던 사람.
잠든 아내의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사람.
그리고 "영국에 가자"는 말을 끝으로 영원한 침묵 속으로 떠난 사람.
최경순 시인은 슬픔 앞에 주저앉지 않았다.
남편이 아끼던 하얀 티셔츠를 태워 만든 사랑의 재를 영국 리버풀 매튜 스트리트 캐번 클럽 앞에 뿌리며, 끝내 함께하지 못했던 여행을 홀로 완성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한 사람의 숭고한 의식(儀式)이었다.
여는 글 마지막에서 시인은 남편을 이렇게 부른다.
"음악에서 꿈 찾아 사랑의 꽃을 피운 DJ, 꽃님이의 남자, 팝을 전도한 영원한 팝의 왕자, 죽어도 아니 열 번 죽어도 잊지 못할 나의 사랑."
이보다 더 절절한 헌사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 때문에 시를 쓰고, 그 사랑으로 시인이 되었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오장 시인은 최경순 시인의 작품세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최경순 시인은 그 사람 때문에 시를 쓰고, 그 사랑으로 시인이 되었다."
짧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이오장 시인은 최경순의 사랑을 백석의 '나와 나타샤', 춘향과 이몽룡,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비견하며, 한 사람을 향한 순애보가 어떻게 보편적인 사랑의 언어가 되는지를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꽃님이'라는 애칭 하나가 평생의 시가 되고, 한 권의 시집으로 피어난 과정을 아름답게 조명한다.
그래서 <그립다는 말 대신>은 개인의 애도를 넘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랑과 상실의 기억을 불러내는 힘을 지닌다.
사람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기억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는 되고, 노래가 되고, 한 권의 책이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립다는 말 대신>은 한 여인이 남편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사이자, 대한민국 팝음악의 한 시대를 이끈 DJ 김광한을 기억하는 문화적 기록이다.
'꽃님아'라는 한마디 애칭은 88편의 시가 되었고, 그 시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사랑과 상실, 그리고 치유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김광한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시집은 그들에게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그립다는 말 대신, 최경순 시인은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시는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사랑의 꽃을 피워내는 문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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