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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민정 시인의 해외문학 순례기⑥… 남미,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을 묻다

삭사이와만·쿠스코 광장·12각돌·마추픽추, 시로 만난 잉카 문명
글·사진 / 김민정(시인·수필가,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천 년을 버틴 돌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김민정 시인의 이번 순례기의 길은 남미 잉카 문명의 심장부인 삭사이와만(Saksaywaman)과 쿠스코, 마추픽추를 순례하며 자연과 인간, 문명과 시가 교차하는 지점을 기록한다. 거대한 자연 속에 새겨진 인간 삶의 무늬를 따라가는 여섯 번째 해외문학 순례기다.[편집자 주]

쌓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돌

신에게 간구하듯
촘촘히 맞물려서

저 석벽
매의 머리로
신의 잠을 청한다

- 김민정 시조 '삭사이와만' 중에서


2025년 5월 4일과 5월 5일, 잉카 문명을 만나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루어낸다."고 노자는 말했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다."고 레이철 카슨은 말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것을 느낀다. 자연 속에 만든 인간의 역사를 둘러보는 일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고 에드워드 카는 말했다. 잉카 문명을 만나 보기 위해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쪽 남미까지 해외 한국문학 심포지엄을 온 것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핵심이 페루 마추픽추다.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을 도시락으로 챙기고, 리마 공항에서 쿠스코로 출발했다. 3,400미터의 고산지대인 쿠스코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잉카 문명의 유적지인 12각돌, 쿠스코 광장, 삭사이 와만, 켄코, 탐보마차이 등을 구경하고 우루밤바로 이동하여 저녁에 호텔에 투숙할 예정이다.

나는 전날 조금 늦게까지 <월간문학>에 관련된 일을 하고 조금 춥다고 느끼며 잤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감기 기운이 있었고 얼굴은 부어 있었다. 그래서 감기약을 먹었는데, 감기에 좋다며 회원들이 약을 주셔서 먹다 보니 약을 과용하였나 보다. 약에 취한 듯 걷거나 다닐 때는 모르겠는데, 앉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서 힘들었다. 콧물약을 먹었는데 콧물은 계속 나고….

그래도 씩씩하게 다니며 볼 것은 거의 보았다. 먼저 삭사이와만을 보러 갔다.


삭사이와만(Sacsayhuaman)은 페루 쿠스코 북쪽에 위치한 잉카 제국 시기의 거대 고대 유적지로, 규모와 정교한 석조 건축 기술로 유명한 곳이다. 페루 쿠스코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2km, 해발 약 3,700m에 위치하고 있다. 가이드가 걸음을 천천히 걸으라고 해서 천천히 걸었다.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준비했던 약을 2알 먹어서인지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삭사이와만의 뜻은 케추아어에서 saqsay는 '만족한, 가득 찬', waman은 '매'를 뜻하여 "만족한 매" 또는 "왕매(Royal Eagle)"로 해석된다.

잉카 황제 파차쿠티와 후계자들이 15세기에 시작해 약 60~90년간 약 20,000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축조를 했으며,  주로 제사 및 천문 관측용 성소, 도시 방어 요새, 군수 저장소 등 복합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 침략 이후에는 1536년 잉카 저항의 중심이었으나, 승리한 스페인이 요새의 돌을 빼내어 쿠스코의 교회 등 식민지 건축에 재활용 했다.

석벽은 최대 128~200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들이 정밀하게 맞물리며,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부로 기울어진 설계를 했으며, 지그재그 성벽은 푸마의 이빨을 형상화한 듯한 형태로 3단 구조로 이루어진 성벽은 총 길이 약 400m, 높이 약 6m이며 전체 돌 부피는 6,000㎥ 이상이다.

구성은 세 개의 탑(Muyuccmarca, Paucarmarca, Sallaqmarca)과 (Chincanas)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년 동지 직전인 6월 24일 쿠스코에서는 '인티 라이미(Inti Raymi)'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며, 9월 셋째 주 일요일에는 '와라치쿠이' 행사도 진행된다고 한다.

2025년 고고학자들이 지하 통로망을 지오레이다(지하 레이더)로 탐지하여 삭사이 와만부터 코리칸차까지 약 1.75km 터널 연결 가능성을 주장 중이며, 곧 실제 발굴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백과사전, 가이드 설명 참조)

이곳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이렇게 큰 돌들을 어떤 장치로 이렇게 정교하게 쌓아 올렸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볼수록 정교하고 정밀하고 아름답다. 정밀한 돌의 맞춤 구조, 지그재그 형태로 쌓은 돌들은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게 내진을 설계했고,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 등 뛰어난 점이 참 많다. 자연 속에 다양한 삶의 무늬를 그려놓은 잉카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쿠스코 광장을 보기 위해 갔다.


쿠스코(Cusco)의 Plaza de Armas, 즉 쿠스코 광장은 잉카 제국과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역사가 어우러진 도시의 중심이다. 원래 잉카 시대에는 케추아어로 '전사들의 평지' 또는 '눈물의 광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국의 중심 의식과 정치, 종교의 공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의 시조 만코 카팍이 아버지 태양신(Inti)의 지시에 따라 금막대를 박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으며, 이로 인해 쿠스코가 제국 수도로 선정됐다는 설도 전해진다.

16세기 스페인의 침략 이후 쿠스코가 점령되며, 풍부한 잉카 건축물은 철거되거나 스페인 양식의 건물로 대체되었다. 현재 성당과 예수회 교회 등이 광장을 둘러싼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쿠스코 대성당(Cusco Cathedral)은 광장의 북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식민지 시대 건축물로, 잉카 궁전터 위에 세워졌으며 고딕·르네상스·바로크·플라테레스코 양식이 혼합된 구조이다. 내부에는 잉카 스쿨 화가들의 회화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예수회 교회(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는 1576년부터 착공되어 1673년에 완공된, 아메리카에서 가장 뛰어난 바로크 양식의 교회 중 하나다. 건축물은 고대 잉카 궁전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 내부 장식과 석조 세공이 뛰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잉카계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투팍 아마루 2세는 쿠스코 광장에서 공개 처형(1781년)되었고, 그의 사체는 여러 지역에 전시되며 반란 진압의 경고로 활용되었다. 현재 광장에는 그를 기리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처형과 군사 집결지로 군사 훈련과 공개 처형 등 권력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현재 쿠스코 광장은 현대의 관광 중심지이자 지역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매년 6월 24일 ‘인티 라이미(Inti Raymi)’ 축제가 이곳에서 시작되어 삭사이 와만까지 이어지는 의식이 펼쳐지는데 태양신(Inti)에 드리는 잉카의 새해 축제로 많은 관광객이 참여한다. 또한 독립기념일 행사(7월 28일) 등도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잉카 전통과 가톨릭 문화가 섞인 여러 축제의 무대가 된다고 한다. (위키백과 및 가이드 설명 참조)

감기 기운이 있는 내가 추워 보였는지, 파주에 사시는 황정희 시인이 숄을 하나 걸쳐주었다. 감기 얼른 나으라며. 여러 가지로 고마운 시인이다. 공항에서 무거운 내 스페인어 책을 들어주기도 하여 여행 내내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다. 상대를 배려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따뜻한 숄을 걸치니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감기 기운이 훨씬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광장을 둘러보고 12각돌이 있다는 골목길을 보러 갔다. 돌조각을 잘 활용하여 건물을 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틈없이 돌을 그렇게 쌓을 수 있다는 그들의 돌 활용 능력을 보면서 참으로 신통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나는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어 저녁도 안 먹고 잤나 보다. 깨어나니 밤중이었는데, 같은 방을 쓴 권남희 회장이 죽을 챙겨 두었다가 먹으라고 주는 바람에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먹었다. 빨리 감기를 나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감기 기운이 있는 나를 주변 사람들이 따뜻하게 도와주어 너무나 고맙고 내가 인복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는 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여기서는 코카잎을 많이 먹는다. 차가 주로 코카잎 차다.

2025년 5월 5일, 마추픽추에 가는 날 우리는 기차를 타기 위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우루밤바 오얀따이 탐보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기차를 탑승하고 2시간 정도 가서 마추픽추역에 도착하여 마추픽추 유적지를 보러 갔다.

기차를 타고 가는 2시간 동안 우루밤바 강이 계속 기찻길 옆을 함께 달리고 있었다. 기차는 오는 기차를 피하기 위해 2번 정도 역에서 쉬는 것 같았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가면서 높은 안데스 산맥으로 구름이 흐르는 모습을 보았다. 높은 산들을 배경으로 열심히 핸드폰 셔터를 눌렀지만 좋은 사진은 몇 장 없었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마추픽추 매표소 입구로 들어갔다. 우리 외에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다. 호텔을 출발할 때는 비가 약간 내리는 날씨였으나 마추픽추에 오르는 시간은 날씨가 쾌청하여 맑은 공기를 마시는 기분은 너무나 상쾌하고 기뻤다.






잃어버린 시간 위에
숨결처럼 놓인 돌아,
구름이 감싸 안는
안데스 산등성이
누구냐, 높은 여기에
해와 달을 올린 자는

이곳에 발을 딛고
가만히 귀를 열면
계단을 오르내린
바람의 종아리를
햇살이 쓰다듬느라
계절이 익고 있다

허물어진 무엇 없이
천 년을 견뎌가며
오늘을 살아내는
단단한 너의 얼굴
새겨둔 이름 없이도
떠난 이는 남아 있다

- 김민정 시조 '마추픽추를 찾아' 전문



마추픽추(스페인어: Machu Picchu)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요새 도시이다. 15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잉카 제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발 2,430m나 되는 산맥의 정상에 위치해 있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80km 정도 떨어져 있고, 우루밤바 강이 도시가 있는 산맥 아래를 꺾어 흘러가고 있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파차쿠티 황제가 이 요새 도시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잃어버린 도시'의 이미지로 잉카 문명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추픽추는 1450년 즈음에 지어졌고, 약 1세기 후에 스페인의 침략과 비슷한 시기에 버려졌다.





마추픽추는 잉카 고전 양식으로 지어졌다. 접착제나 모르타르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돌과 석재들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고, 주요 건물은 해시계, 태양의 신전, 세 창문의 방 등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페루 정부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시킨 것으로, 1976년에 전체 유적지의 약 30% 정도가 복원되었고 현재도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새로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고대 잉카 언어로 마추픽추의 '마추'는 옛, 혹은 옛날을 뜻하며, '픽추'는 고대 잉카인들이 마약 용도로 주로 사용하던 코카잎, 피라미드 등을 뜻한다. 때때로는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도시의 건축은 2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감독하였는데, 첫째는 파차쿠티이고 둘째는 투팍 잉카 유팡키이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 원정을 끝낸 후, 황제 전용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추픽추에 살던 거주민들이 스페인에서 전해온 천연두와 같은 질병들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

마추픽추가 황제의 궁전이었을 당시, 이곳에는 약 750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종교적, 군사적인 이유로도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거나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때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를 100여 명 이내로 줄이고 오직 최소 인원의 제사장들만 남겨두어 제사를 지속시키도록 하였다.

농업은 주로 계단식 농업이었다. 3m의 높이를 가지는 단들이 모두 40개나 존재하고, 약 3,000개나 되는 계단들로 이를 잇고 있다. 마추픽추 주변 지역은 연간 약 1,800mm의 강수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잉카인들이 밭에서 주로 재배하던 감자나 옥수수에 필요한 강수량을 충분히 충족했기 때문에, 마추픽추의 밭에는 특별한 수로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이 밭들의 총 면적은 고작 4.9헥타르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는 750명이나 되는 인원을 먹여 살리기에는 부족했다. 종종 사람들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식량들을 새로 가지고 올라와야만 했다.

스페인에게 발견되지 않았기에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의 다른 유적들처럼 사원이나 묘지 권역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1911년, 미국의 역사가이자 탐험가인 하이럼 빙엄이 잉카 제국의 잊혀진 수도, 빌카밤바를 찾아 모험을 떠났고, 마추픽추를 찾아낸다.


1981년, 페루 정부는 마추픽추와 그 주변을 역사 보존 영역으로 선언하고, 개발 제한을 선포했다. 1983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인류 건축 기술의 걸작이자, 잉카 문명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마추픽추는 3,400m의 쿠스코보다 약 1,000m 정도 낮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마추픽추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손꼽히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페루의 관광지다.

마추픽추는 우루밤바 강에서 450m 정도 올라간 절벽에 위치해 있는데, 이 강은 유적지 전체를 감싸 흐른다. 마추픽추의 위치는 잉카 제국의 군사 기밀이었고, 거대한 강과 절벽, 산들이 이 요새를 지키는 천연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또한 마추픽추 유적지는 거대한 두 산, 마추픽추와 우아이나 픽추 사이에 끼어 있다.

마추픽추로 통하는 길은 총 2개가 있는데, 하나는 태양의 문을 통과하는 경로로 쿠스코까지 직통으로 연결되고, 또 다른 하나는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잉카식 밧줄 다리이다. 모두 쉽게 차단,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마추픽추가 요새 도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도시 구역과 농경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위쪽 구역에는 주로 신들을 모시는 신전과 사원, 아래쪽 구역에는 주민들이 살았던 거주 시설들이 있다. 200개가 넘는 건물들이 중앙 광장을 둘러싼 형태로 산 곳곳에 있는 테라스들에 세워져 있다. 건물들은 대부분 길고 좁은 모습이며, 정교하게 제작된 수로들이 도시 곳곳에 물을 수송한다. 벽들에 붙어 있는 형태로 시공된 돌계단들은 사람들이 유적지 곳곳을 오르내릴 수 있게 한다.

해시계, 태양의 신전, 세 창문의 방 등은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잉카 고유 신앙에서 가장 위대한 태양신이었던 인티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살던 곳은 식량 저장 창고, 석조 가옥들이 나열되어 있다. 마추픽추의 감시탑은 높은 지붕을 가진 석조 건물인데, 독특하게도 한쪽 벽이 완전히 트여 있다. 이와 같은 잉카 고유의 건축 양식을 ‘와이로나’ 양식이라고 한다. (위키백과 등 참조)

마추픽추를 둘러싼 안데스 산맥은 장엄하다. 이렇게 산속 공중에다가 도시를 건설했던 잉카족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건설해 놓고도 겨우 1세기밖에 살지 못하다니… 아쉽다.

거대한 자연을 활용하며 계단식 밭을 가꾸고 돌집을 짓느라 그들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돌들은 어디서 가져오고 돌들을 어떻게 다듬었을까. 떡 주무르듯 돌을 주물렀던 잉카인들을 생각하며 많은 생각에 잠긴 하루였다.

가이드는 진짜 마추픽추는 여기가 아닌 맞은편 산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진 이유를 남자들은 전장에 불려 나가고 여자들만이 지키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만난 안데스 산맥과 마추픽추는 장엄했고, 경이로웠다. 마추픽추에서는 '철새는 날아가고'와 '외로운 양치기' 노래가 계속 내 귓가를 맴돌았다.


다음 호에서 만날 길

고도를 따라 숨이 가빠질수록, 삶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안데스의 품에 안긴 도시 라파즈에서 하루는 위로 오르고, 다시 아래로 흐른다.

텔레페리코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하늘을 건너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다. 마녀시장의 골목에서는 오래된 믿음과 오늘의 현실이 나란히 좌판에 오른다.

부적과 약초, 웃음과 흥정 사이로 남미의 시간은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흘러간다.

다음 호에서는 '남미, 거대한 자연과 다양한 인간 삶의 무늬 7'이다. 볼리비아 라파즈 시내에서 시작해 텔레페리코 케이블카를 타고, 마녀시장 골목까지 걸어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더 인간적이고, 낯선 땅에서 만난 사람들의 하루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다음 여정은, 그렇게 하늘과 골목 사이에서 이어진다.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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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준 시인, 나무의 언어로 존재를 묻다… 시집 <초록을 걷다> 출간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정유준 시인이 새로운 시집 <초록을 걷다>를 출판사 시간의 물레를 통해 펴냈다. 오랫동안 자연과 나무를 시적 화두로 삼아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나무와 숲, 잎사귀와 계절의 언어를 통해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탐색한다. <초록을 걷다>는 단순히 자연을 노래하는 시집이 아니다. 시인에게 나무는 한 그루의 식물이기 이전에 지나온 시간의 기억을 품은 존재이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고, 삶과 세계의 의미를 묻는 하나의 철학적 공간이다.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인간을 향하고, 숲을 걷는 발걸음은 마침내 자기 존재의 깊은 곳으로 향한다. 나무는 시인에게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번 시집의 중심에는 단연 '나무'가 있다. 해설을 쓴 양병호 시인·전북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는 정유준 시의 세계를 두고 "시인은 '나무'에 집착한다"며 "편집증으로 오해할 정도"라고 표현하면서, 그 나무가 단순한 자연의 소재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론적 성찰을 이끌고 인생의 본질과 세계의 궁극을 이해하게 하는 촉매라고 평한다. 실제로 <초록을 걷다>의 시편들에서 나무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존재다. 갈참나무와 생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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