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없다'는 뜻의 '공전절후(空前絶後)'라는 말이 있다. 비교할만한 것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는 의미도 지닌다. 주로 영화 선전에 이용된 말이다. '공전의 히트'라는 문구와 같은 것들이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공전절후’에 흥행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더한 부류도 있다. 언어의 건축자인 시인이다. 시(詩) 도반은 바람에 언덕에서 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에게 '공전절후'의 시인이라 불러주고 싶다. 1980년대 바람의 시인으로 시, 동시, 종교시, 논설문에 이르러 계관시인 후보에 오른 천상시인이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나도 너도 볼 수 없었지/ 그러나 나뭇잎이 매달려 떨고 있을 때/ 바람은 가로질러 가고 있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너도나도 볼 수 없었지/ 그러나 나무들이 머리 숙여 인사할 때/ 바람은 지나간다//' 크리스티나 로제티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시 전문이다. 1830년 12월에 태어나 1894년 12월에 독신으로 살다간 영국이 내세우는 여류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는 눈보라 치는 12월에 태어나 눈보라 치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시(詩)도반은 故 황금찬 선생과 우이동, 한마을에 살면서 행사장 동행이 잦았다. 비 내리는 여름날이다. 이탄 시인, 황금찬 선생과 한국기독교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청주 동행이었다. 황금찬 선생은 평소 유머가 많다. 문인들의 여자관계도 구수하게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야기 끝에는 "내가 본 것이 아니에요. 들은 이야기에요"라며 마무리한다. 이야기가 끝났다 싶은데 한참 후 다시 강조한다. "시도반 선생, 내가 목격을 한 것이 아니라 들은 이야기입니다"라고 다시 못 박음질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참을 웃곤 했다. 이야기 중 이탄 선생이 한 달에 한두 번은 고스톱을 치는 것이 낙(樂)이라 한다. 황 선생은 시인이 고스톱을 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 당부한다. 황 선생은 교회 장로다. 이탄 선생은 정년 후 유일한 낙이라며 웃는다. 청주 가는 길은 멀었다. 황 선생은 시집을 펴내며 제목에 신경이 쓰인다는 화두를 꺼낸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짐승과 식물의 이름을 짓는 것에 신경이 크게 쓰였을 것이라 한다. 선생은 악기 중에 가장 퇴폐적인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말이 없자 '섹소폰'이라 한다. 교회 연주에 사용하지 않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몸을 비빈다. 서걱서걱 소리다. 순정으로 전신을 비비는 억새, 폭풍우에도 초연하다. 푸른 피를 비비는 억새는 푸른색을 걸고 신과의 특별한 언약이 있었던 것일까. 가느다란 허리에 서로서로 껴안고 바람불어 흔들릴 뿐, 넘어지지 않는다. 기대는 사랑이 무섭다. 손 베일 것은 날카로운 잎새도 진실로 껴안으면 베이지 않는다. 마치 정신을 살리는 선비와 같다. 억새와 꽃들이 지구를 살리고 있다. 어제는 꽃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별을 보았다. 내일은 바람을 만날 것이다. 억새와 눈빛과의 약속은 사뿐사뿐 낡아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 독일 문학에 노발리스(Novalis, 1772~1801)가 쓴 장편 소설 '푸른 꽃'(집필도 중 작가는 요절, 미완의 작품)이 있다. 스무 살 청년 하인리히는 꿈에서 푸른 꽃을 보게 된다. 그가 푸른 꽃으로 다가서자 꽃이 상냥한 여자로 변한다. 그 소녀를 동경한 하인리히는 꿈에서 깨어나 여자를 찾아 먼 여행길을 떠난다.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크링스오르를 만나고, 그의 딸 마틸데를 보자 꿈에서 본 푸른 꽃의 모습이라 좋아한다. 그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꿈을 꾼다. 나룻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호랑이 봉초 담배 말아 피던 시절이다. 거슬러 올라 1966년부 전화번호부 책이 발간되었다. 대기업, 중소기업의 홍보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책을 펼치며 가장 많은 이름을 헤며 놀던 시절도 있었다. 한가하기 짝이 없는 해찰이다. 전화번호부에는 '자(子)' 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았다. 미자, 춘자, 금자, 해자 같은 이름이다. ‘자’자 끝 이름을 흔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자’ 자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다. 중국 역사에 '자(子)' 자를 붙이면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일컫는다. 노자, 공자, 맹자, 순자와 같은 학자에게 붙여주었던 경우다. 우리나라에도 ‘자’ 자를 붙여준 딱 한 분의 학자가 있다. 바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다. 이 칭호는 송자(宋子) 말고는 우리 역사에 두 번 다시 없다. 송시열은 17세기 사람이다. 키가 1m 90cm로 기골이 장대했다. 송자에게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기록이 한두 개가 아니다. 기네스북이 없던 시절, 세계공식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한 사람의 이름이 3000번 이상 거듭 기록은 오직 우암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 평균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아모르 파티'는 가수 김연자가 유쾌함을 불러들여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노래다. 대중가요로는 드물게 43행의 긴 가사다. 이건우와 신철 두 사람이 공동 작시도 특징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인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fati)을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사랑(amor)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 거듭남을 담았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생에서 만나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과 같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의 유배 생활에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를 수십 번을 부르지 않았을까. 추사는 모험과 좌초를 아모르 파티처럼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18세기의 추사에게 21세기에 만들어진 아모르 파티를 알 리 없다. 다만 그런 심정으로 유배 생활을 견디었을 것이라는 유추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생활은 무려 8년 4개월이었다. 유배 생활에서 유명한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가 만들어졌다. 세한(歲寒)은 추위 중에서도 가장 추운 시간을 뜻한다. 세한도에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신의 품격이 새겨져 있다. 추사에겐 돈독한 이상적 제자가 있었다. 모두가 추사를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두 살배기 세자가 '천지왕춘(天地王春), 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詩를 하얀 화선지에 써 내려 간다. 지켜보던 각료들은 세자가 쓴 시를 서로 갖겠다고 다툼이 생겼다. 영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세련된 세자의 시에 미소 짓는다. 각료들의 행동에 한없이 기뻐한다. 때는 1737년(영조 13년) 2월 14일의 창경궁 문정전의 풍경이다. 이날 봄 햇살은 궁궐 안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최상의 쾌청 날씨였다. 같은 해 9월 22일에 세자는 종이 12장에 두 글자씩 쓴 글을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여러 대신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자는 명석한 두뇌와 남다른 시적 감각을 지니고 태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시도반(詩道伴)은 비 오는 날이면 창경궁 내전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을 걷는다. 집복헌은 사도세자가 탄생한 공간이다. 창경궁 중앙의 명정전을 지나 동쪽에 있다. 비교적 한적한 궁의 내전 중 하나다. 집복헌 옆 평평한 너럭바위가 인상적이다. '관람로가 미끄러우니 주의 하십시오' 영어와 한글의 바닥 안내판이 두세 개 있다. 어쩌면 세자가 너럭바위를 걷다 미끄러진 예도 있었지 않았나 싶다. 너럭바위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개똥철학의 유래를 아세요." 근사한 우리말들의 유래를 찾아 나서면, 전해 내려온 말이라는 것으로 사전은 정리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멋진 말을 남기고도 조용히 앉아 계시거나 시치미를 띠고 말이 없는 것일까. 강단의 철학자에 물었다. 개똥철학이라는 말은 철학의 동네, 독일에도 없고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며 웃는다. 개똥철학은 '철학'의 학문을 가르치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관점과 시야가 좁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르는 의미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헤겔이나 칸트가 말했듯, 철학이라는 학문은 이해하기도 어렵다.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학문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 아는 체하거나, 알량한 지식으로 혹세무민하는 등 부정적인 의미로 옛 어른은 사용해 왔다. 우리나라에 '개똥철학'에 관한 저서도 몇 분이 펴냈다. 여러 시인이 시로 남기기도 했다. 개똥철학이 갖는 해학 넘치는 내용 들이다. 개똥이란 아무짝에도 쓸 곳이 없다. 동네의 골목에 방치된 똥이다. 요즘은 반려견으로 개똥을 주인이 당연하게 처리하는 시대다. 영국의 공원에는 개똥을 모아주는 개똥 쓰레기통도 있다. 우리는 나라 공원 환경은 그 정도까지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대학로엔 남이장군(1441~1468) 집터가 있다. 남이장군은 詩 한 편을 쓰고 그 시로 말미암아 오지가 찢긴 참혹한 죽임을 당한 시인이며 무관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장군의 집터의 정확한 위치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의 후문 근처다. 종로5가역 방향으로 200m 정도 내려가다 보면 남이장군이 태어난 집터라는 돌판이 도로변에 위치한다. 가까이 있는 꽃가게 주인은 간혹 자그마한 꽃 화분을 시인 남이장군 집터 돌판 아래에 놓곤 한다. 꽃집은 1평도 되지 않지만 비교적 손님이 끓이지 않아 장사가 잘 되는 꽃집이다. 시도반(詩道伴, 詩 공부자)은 그 꽃집의 주인이 남이장군 집터에 꽃 화분을 놓는 것에 늘 궁금했다. 주인에게 묻기보다는 추측을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힘이 센 장군을 사당에 모신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영하다는 무속인에 의하면 무속인들이 남이장군을 가장 많이 모셨을 것이라 한다. 연유인즉, 남이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나이인 17세(세조 3년 1453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다. 장군은 이시애(李施愛) 난을 3개월 만에 평정한 기개를 보인다. 여세를 몰아 만주 요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기형도 시인의 유작, '잎 속의 검은 잎' 시집의 시작(詩作) 메모다. 1980년대, 시집들 판형은 활자들이 7포인트, 가난한 크기로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한다. 자연은 동사라는 말처럼 기형도 시인은 바깥으로 내모는 자연을 담은 시로 출렁거린다. 김현 평론가는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읽은 기사는 환각처럼 짧은 일단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라는 말로 해설의 첫 머리말을 시작한다. 한 시인의 죽음을 아주 비장하게 기록한다. 해설에 앞서 죽음을 이리 긴 논조에 심사(深思) 깊게 기록하는 김현의 입장은 무엇인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경, 종로2가의 한 극장에서 29세로 생을 내린 기형도의 죽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무라카미 하루키(1949~. 일본)의 달리기 습관은 그의 소설과 번역의 작품만큼이나 널리 알려졌다. 마치 스님이 새벽 예불을 드리듯 4시에 기상, 집필실로 향한다. 다섯 시간쯤 글을 쓰고 오후면 수영과 달리기를 한다. 그는 달리기 예찬가이기도 하다. 훗날 자신의 묘비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runner),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새겨달라고 했을 정도다. 김훈 작가는 책상 앞에 '필일오(必日五)'라고 적힌 작훈(作訓)이 있다. 날마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을 쓰겠다는 다짐이다. 김훈 작가가 다섯 장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습관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이 간다. 학자들의 습관은 궁둥이에 땀띠가 나게 하자는 말도 있다. 책상과 의자를 떠나지 않는 학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에게 일정한 분량을 꾸준하게 써내는 습관은 그리 만만한 습관은 아니다. 학인은 우리나라에서 관찰과 습관의 표징 적인 분을 들라면 단연 이순신 장군이라 한다. 충무공 이순신이야말로 탁월한 견자이자 성실한 관찰자였다. 이순신 장군은 다양한 일과 전쟁을 치르면서 고뇌의 일상들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인상적인 것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간밤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깨어나셨어요. 어제 보던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래요." 시체도 깨어나게 한다는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극작가를 말하는 우스개 농담이다. 하지만 김수현도 글의 첫 문장을 위해 펜촉의 예열(豫熱)은 총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첫 문장은 작가와 독자가 처음 눈빛 교환의 순간이다. 아차 하면 드라마의 경우는 채널은 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시(詩) 창작도 그렇다. 첫 행이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떠다니는 생각과 감정을 낚아 끌지 못하면 다음 행은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다. 어니스트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Miller.1899~1961)는 소설 '노인과 바다'의 도입 부분에 200번 넘게 수정한 문장을 사리처럼 빛이 나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그는 멕시코 만류(灣流)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서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이런 경우 패배에 익숙해질 만도 하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의 처지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의 헤밍웨이의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 누구나 시련은 있는 법. '무기여 잘 있거라'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오늘도 눈이 내리 내요" 학인의 전화다. "무슨 말씀이세요. 4월인데요. 저 사는 동네, 성북동은 쾌청합니다." "아 네, 저의 마음에 눈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학인의 마음의 온도,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라는 것은 폭은 함을 상징도 하지만 매섭고 우중충한 날씨가 되기도 한다. 특히 시인들에게는 눈에 대한 인식이 트라우마인 경우도 있다. 시간은 1945년이다. 용정의 3월 초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용정역에서 2백 리나 떨어진 두만강 변의 한국 영토인 상삼봉역(上三奉驛)에는 그날따라 정갈한 농지기(혼수 婚需의 전라도방언)를 입고 나온 시골 사람이 붐볐다. 눈은 내리면서 얼어붙고 있다. 그날의 눈은 눈물을 흘리면서 휘날리는 것이다. 모두가 긴장된 모습들이다. "저기 온다, 저기." 시선들이 한곳으로 쏠렸다. 백발이 성성한 윤영석 앞으로 흰 상자 하나가 건네졌다. 차가운 시간의 공간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고인이 된 시인의 유골은 눈이 내리는 상삼봉역에 말이 없이 내린 것이다. 별의 시인, 서시의 동주는 말이 없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멈춤의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절친이 몇이나 되세요?" 학인의 물음이다. 절친, 다섯 명이면 잘 산 인생이란다. 학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휴대 전화기에 저장된 숫자를 본다. 600여 명이 저장됐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절친은 아니지 않은가. 학인은 로빈 던바(Robin Dunbar·옥스퍼드대) 교수가 30년간 분석한 자료를 들어가며 말을 이어간다. 참고로 던바 교수는 '사랑에 관한 연구'와 같은 흥미로운 저서의 심리학자다. 던바 교수는 인간이 주저 없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회적 뇌'는 150명이라 한다. 150명이라는 수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공동체의 크기를 가리킨다. 피그미족이 이루는 공동체는 150명이다. 피그미족을 예로 든 것은 신체가 작은 인간이 가장 순수하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종족을 하나의 사례로 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조사한 결혼식의 하객은 평균 144명이었다. 수천만 명이 도시에 모여 살지만, 인류가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의 크기는 일정한 수준이라 설명한다. 던바 교수의 분석은 친밀이란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의 크기를 친밀함에 따라 구분이 된다. 우정의 원리라는 가설로 절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한국 시단에 영글진 시(詩)의 씨앗은 단연 이규보(1168~1241)에서 시작된다 해도 좋다. 이규보 시인 하면 술의 끝에 시가 흐르고 있다. 열한 살에 숙부가 장난삼아 시를 짓게 하면서 ‘지(紙)’자를 운(韻)으로 주었다. 옛 선비들은 시의 운을 주는 것이 보편이었다. '기나긴 종잇길에 모학사(붓)가 가고/ 술잔의 마음은 항시 국선생(누룩)에 있다.' 종이에 연상되는 것은 붓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행(行)에 술잔을 내세운 것이 섬 듯, 혀를 내두를 시성(詩聖)이 아니런가. 분명 11세의 소년으로 엉뚱하기 이를 데 없다. 숙부는 물론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규보의 집안은 하인이 80여 명이라는 것을 보면 여유 있는 집안이다. 규보 시인이 11세에 술맛을 알았다는 것은 생물학적 논리로 규정하지 말자. 시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이 시인의 주량과 술을 즐긴 나이를 가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다. 이 시인이 술을 좋아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시편에는 '시의 즐거움', '술의 즐거움'이 따라다녔다. 이규보는 2만 수의 시를 남겼다는 평론이다. 하지만 상당수가 유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술은 시가
(서울=미래일보) 최창일 시인 = "이태석 신부가 배추밭을 일구고, 김근태 의원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학인의 꿈 이야기다. 꿈인즉, 이태석 신부가 멀리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가난(家難)만 있고 부유(富有)가 없다. 빈부격차도 없다. 톤즈에서 주민을 위해 헌신하던 이태석 신부의 기록 영화다. '울지마 톤즈' 영상을 보다가 잠들어 꾼 꿈이 아닌가 싶다는, 부연설명에 이해가 됐다. 그런데 김근태 의원의 등장은 무엇이냐 물었다. 학인도 밋밋한 꿈이라며 피식 웃는다. 다만 이태석 신부와 김근태 의원같이 선하디선하고 소명의식이 뚜렷한 선인(善人)이 천국에서도 공동체를 만들어 김치를 밥상에 올리는 모양이라는 해석이다. 김근태 의원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군사정권하에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당했다. 후일 의원이 됐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저세상 사람이 됐다. 이태석 신부는 선교지 톤즈에서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짓고 교육과 의료 활동을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에서 보지 못한 두 가지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손바닥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무수한 밤하늘의 별‘과 ’손만 내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투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