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다"며 "집에서 쓰러진 뒤 119구급대로 순천향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한 달 전부터 기력이 떨어져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야는 공식 논평을 내고 김 전 총리의 별세를 애도했다. 그리고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성태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이 이날 오후 5시쯤 조문할 예정이다.
박범계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현안 서면브리핑을 통해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별세를 국민과 함께 애도한다"고 밝혔다.
박 수석대변인은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별세를 국민과 함께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5·16군사 쿠데타, 한일 국교정상화, 9선의 국회의원, 두 차례의 국무총리, 신군부에 의한 권력형 부정축재자 낙인, 자민련 창당, 삼김시대 등 고인의 삶은 말 그대로 명암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어 "가히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다 할만하고, 고인의 별세로 이제 공식적으로 삼김시대가 종언을 고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박 수석대변인은 또 "고인의 정치 역경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살아가는 후대에게 미루어 두더라도, 고인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다시 한 번 국민과 함께 고인의 운명을 애도한다"고 명복을 빌었다.
자유한국당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타계하셔서 더욱 마음 아프고 고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며 김 전 총리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김성원 한국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정치사의 거목이시며 증인이셨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님께서 오늘 별세하셨다. 가슴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대변인은 "고인께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통해 10대 경제 대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그러면서 "고인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며 "이승의 무거운 짐은 이제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라"고 했다.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은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와 배고픔을 이겨내고 오늘의 경제 대국이 되기까지 그분의 족적이 너무나 중요하게 느껴진다"며 "특히 보수정당의 절체절명 위기에 김 전 총리의 별세 소식을 접해 너무나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김 전 총리의 별세에 대해 "김 총재의 별세에 큰 어른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날 기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한국 현대 정치사에 길이 남을 풍운아였고 각박한 정치 현장의 로맨티스트"였다고 회고했다.
유의동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고인의 영면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한축이었던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며 "하지만 이는 역사의 단절이 아닌 또 다른 미래로 가는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유 수석대변인은 이어 "정치변화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어느 때보다도 거센 지금 고인이 남긴 대한민국 정치사의 큰 걸음을 발판으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장정숙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김 전 총리는)3김 시대를 이끌었던 마지막 한 사람이자 국가의 큰 어른으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장대변인은 이어 "정계 은퇴 후에도 국가의 원로로서 방향을 제시하는 등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왔다"고 설명했다.
추혜선 정의당 수석대변인도 서면브리핑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고인의 기억은 사료와도 같은 가치가 있었다"며 "3김 시대가 끝났다. 오래된 역사의 물줄기가 흘러가고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를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한병도 정무수석을 보내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전달하고 애도를 표했다.
청와대는 김 전 국무총리 별세와 관련해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3일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삼가 조의를 표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시와 서화를 즐겼던 고인은 걸걸한 웃음으로 각박하고 살벌한 정치의 이면에 여백과 멋이라는 거름을 주었다"라며 "고인의 존재감만큼이나 그의 빈자리는 더 커 보일 것이며 우리는 오래도록 아쉬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김 전 총리 별세와 관련해 총리실에 장례를 준비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도 김 전 총리 장례식에 일정 부분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총리의 장례 지원 지시는 김 전 총리가 총리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인 데다 충청권과 보수 진영에서 정치적 원로로 존경하고 있는 상황을 두루 감안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처삼촌이기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1년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30년 이상 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19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이어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며,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내각제 파동과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공동정권 수장 사이의 앙금은 결국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 및 공조파기로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김종필 전 총리 약력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 출생
1944년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및 일본중앙대학 예과 입학·자퇴
1945년 대전사범학교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 부임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 입학
1948년 육군 입대 1주일 만에 탈영 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재입대
1949년 육사 8기 졸업 및 소위 임관(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1951년 박영옥(박정희 전 대통령 조카) 여사와 결혼 및 제1차 군장교단 도미 유학생으로 미 육군보병학교 입학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참여 및 제1대 중앙정보부장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장관과 회담(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초석 마련)
1963년 육군 준장 예편 및 민주공화당 창당위원장
1963년 민주공화당 입당 및 제6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의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71년 민주공화당 부총재 및 제8대 국회의원, 제11대 국무총리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한·일의원연맹 회장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및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1980년 전두환 정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재산 환수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 및 초대 총재, 제13대 대선 낙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1990년 YS·DJ와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해 민주자유당 출범 및 당 최고위원
1995년 민자당 대표위원 사퇴,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 및 초대 총재, 제15대 국회의원
1996년 자민련 명예총재, 자민련은 제15대 총선에서 50명 당선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DJ와 후보 단일화(DJP연대)
1998년 제31대 국무총리
2000년 자민련, 제16대 총선에서 17석 획득(원내교섭단체 구성 실패)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찬성(DJP연대 결렬)
2004년 자민련,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 4명만 당선돼 군소 정당으로 전락 후 정계 은퇴
2006년 자민련, 한나라당과 통합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선대위 명예고문
2008년 뇌경색으로 치료
2012년 새누리당 탈당
2015년 부인 박영옥 여사 타계
2018년 6월 23일 별세
i24@daum.net
청와대는 김 전 국무총리 별세와 관련해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3일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삼가 조의를 표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시와 서화를 즐겼던 고인은 걸걸한 웃음으로 각박하고 살벌한 정치의 이면에 여백과 멋이라는 거름을 주었다"라며 "고인의 존재감만큼이나 그의 빈자리는 더 커 보일 것이며 우리는 오래도록 아쉬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김 전 총리 별세와 관련해 총리실에 장례를 준비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도 김 전 총리 장례식에 일정 부분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총리의 장례 지원 지시는 김 전 총리가 총리를 지낸 거물급 정치인인 데다 충청권과 보수 진영에서 정치적 원로로 존경하고 있는 상황을 두루 감안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처삼촌이기도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61년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30년 이상 정권의 핵심 역할을 했다. 특히 1971년부터 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이어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며,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내각제 파동과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공동정권 수장 사이의 앙금은 결국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 및 공조파기로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김종필 전 총리 약력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 출생
1944년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및 일본중앙대학 예과 입학·자퇴
1945년 대전사범학교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 부임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 입학
1948년 육군 입대 1주일 만에 탈영 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재입대
1949년 육사 8기 졸업 및 소위 임관(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1951년 박영옥(박정희 전 대통령 조카) 여사와 결혼 및 제1차 군장교단 도미 유학생으로 미 육군보병학교 입학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참여 및 제1대 중앙정보부장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장관과 회담(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초석 마련)
1963년 육군 준장 예편 및 민주공화당 창당위원장
1963년 민주공화당 입당 및 제6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의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71년 민주공화당 부총재 및 제8대 국회의원, 제11대 국무총리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한·일의원연맹 회장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및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1980년 전두환 정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재산 환수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 및 초대 총재, 제13대 대선 낙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1990년 YS·DJ와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해 민주자유당 출범 및 당 최고위원
1995년 민자당 대표위원 사퇴,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 및 초대 총재, 제15대 국회의원
1996년 자민련 명예총재, 자민련은 제15대 총선에서 50명 당선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DJ와 후보 단일화(DJP연대)
1998년 제31대 국무총리
2000년 자민련, 제16대 총선에서 17석 획득(원내교섭단체 구성 실패)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찬성(DJP연대 결렬)
2004년 자민련,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 4명만 당선돼 군소 정당으로 전락 후 정계 은퇴
2006년 자민련, 한나라당과 통합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 선대위 명예고문
2008년 뇌경색으로 치료
2012년 새누리당 탈당
2015년 부인 박영옥 여사 타계
2018년 6월 23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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