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붉은 장미 한 무더기가 순간 궁중의 행렬로 변한다. 활짝 핀 꽃은 왕비가 되고, 뒤따르는 봉오리들은 상궁과 시녀가 된다.
사진 한 장 속 풍경을 상상력의 궁궐로 바꾸어 놓는 힘, 그것이 디카시의 매력이다. 장항라 시인의 「왕비의 행차」는 짧은 언어 속에 화려함과 허무, 기다림과 그리움을 함께 담아낸 작품이다.
장미꽃의 개화와 시듦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사랑, 존재의 쓸쓸함까지 응축해 보여주는 이 작품은 생활 속 감각이 어떻게 시적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디카시] 왕비의 행차
- 시·사진 / 장항라 시인
옆 상궁, 뒷 상궁
철 이른 시녀들
벙그러져도
오무라드는 왕 다툼
전하, 어디 계시온지요
■ 감상·해설 / 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
짧은 다섯 행이지만 시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결코 작지 않다.
시인은 붉게 핀 장미 군락을 바라보며 단순한 꽃의 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서 궁중의 질서와 권력, 여인들의 긴장과 기다림을 읽어낸다. 꽃송이들은 어느새 왕비와 상궁, 시녀들로 변모하고 독자는 장미꽃 사이로 지나가는 한 편의 사극을 보게 된다.
첫 구절 "옆 상궁, 뒷 상궁 / 철 이른 시녀들"은 장미의 피어나는 순서를 절묘하게 의인화한다. 활짝 핀 꽃은 중심에 선 왕비 같고, 미처 피지 못한 봉오리들은 아직 세상 물정을 다 배우지 못한 어린 시녀들처럼 보인다.
꽃의 배치와 높낮이, 봉오리의 방향까지도 시인의 눈에는 궁중의 위계와 움직임으로 읽힌다.
이어지는 "벙그러져도 / 오무라드는 왕 다툼"은 이 작품의 백미다. 꽃은 피어나는 순간 가장 아름답지만 동시에 가장 빠르게 스러짐을 향해 간다.
시인은 개화와 시듦의 반복 속에서 인간 세상의 욕망과 경쟁을 포착한다.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한 다툼일 수도 있고, 더 아름답고 더 오래 빛나고 싶은 존재들의 운명 같은 몸부림일 수도 있다. 장미는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 안에는 이미 쇠락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마지막 구절 "전하, 어디 계시온지요"는 이 짧은 시를 단숨에 서사적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정작 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재가 오히려 더 큰 그리움과 긴장을 만든다.
기다림은 때로 존재보다 더 선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저마다의 '전하'를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랑, 인정, 성공, 혹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 어떤 이상향 말이다.
이 작품은 디카시가 가진 특성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눈앞의 현실을 붙잡고, 시는 그 현실 속에 숨은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낸다. 디카시는 짧지만 결코 얕지 않다. 순간의 풍경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하는 문학적 감각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항라 시인(본명 장인숙)은 대구 수성구에 거주하며 평생교육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수강생이다.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감각과 따뜻한 시선으로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데 관심이 많다.
화려한 수사보다 생활 속에서 발견한 이미지와 감정을 간결하게 포착하는 데 강점이 있으며, 특히 꽃과 자연 풍경 속에서 인간사의 감정을 읽어내는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평생교육원이라는 배움의 공간은 단순한 취미의 장을 넘어, 인생 후반의 감성과 사유를 다시 꽃피우는 문학의 뜰이 되고 있다. 장항라 시인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배움의 기쁨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짧은 디카시 한 편 속에서도 그는 꽃을 통해 인간을 말하고, 풍경을 통해 시간을 이야기한다.
초여름 장미는 지금 가장 화려하게 피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눈부시고, 그래서 더 애틋하다. 장항라 시인의 '왕비의 행차'는 바로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붙잡아 우리 마음속 오래된 궁궐의 문을 조용히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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