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상처는 끝내 꽃이 된다… 최대남 시인의 시 '상처'

  • 등록 2025.12.21 11: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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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딘 서정이 아닌, 존재의 형식을 바꾸는 시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단절의 감각을 '꽃'이라는 상징으로 응축


(서울=미래일보) 장건섭 기자 = 바람의 흔들림을 '달게 마신' 자리에서 한 편의 시가 피어났다. 최대남 시인의 시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존재가 도달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받아들이며,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단절의 감각을 '꽃'이라는 상징으로 응축한다.

피고 지는 운명조차 생의 완성으로 끌어안는 이 시는, 고통을 견뎌낸 서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언어의 힘을 보여준다. [편집자주]

상처

- 최대남 시인

바람의 흔들림을 달게 마시고
고개를 들었더니
내게 꽃이래요

내가 마신 흔들림은
바람의 상처
아물지않는 통증 이었대요

그의 고통까지도
한없이 달았어요

그를 사랑하긴 했었나 봐요

상처가 꽃이 된다는 것을
그렇게 피었다 시드는 것만으로
생을 다 살아내는
꽃이 되는 길을

그가 돌아서며 일러주었어요

홀로 우는 기다림은
사랑이 아니어서
꽃도 풀잎도 되지 못하는 거래요

우리가 함께 닿지 못하는
이유도
새벽 꿈길에서 일러주었어요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기에
애써 외면하는 거라고

갈증으로 쓰러지던 날
불어 온 비바람을
달게 마셨어요

그리고 눈을 떴더니
나는 꽃이었어요
온 몸에서
노랗고 붉은 꽃잎이
하염없이 피었다 시들곤 했어요

세상으로 통하던
외나무 다리에서

떨어지던 날

나는 지지않는
당신의 향기가 되고싶어요


■ 작품 감상·해설 / 장건섭 시인(본지 편집국장)

이 시에서 '상처'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가 피어나는 조건이다. 바람의 흔들림을 '달게 마신다'는 첫 이미지부터, 화자는 고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 흔들림이 사실은 "바람의 상처 / 아물지 않는 통증"이었다는 깨달음은, 사랑이란 결국 타자의 고통까지 끌어안는 행위였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시의 사랑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쓴맛까지 삼켜내는 감각의 윤리에 가깝다.

'꽃'의 이미지는 단순한 미화가 아니다. 이 시에서 꽃은 상처가 끝내 선택한 형식이다. "상처가 꽃이 된다는 것", "피었다 시드는 것만으로 / 생을 다 살아내는" 존재는, 완성이나 영원보다 순환과 소진 속에서 자기 몫의 시간을 견디는 생을 상징한다. 꽃은 버티지 않는다. 다만 피고 시들 뿐이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상처의 깊이를 증명한다.

시의 중반부에서 제시되는 "홀로 우는 기다림은 / 사랑이 아니어서 / 꽃도 풀잎도 되지 못한다"는 구절은, 이 작품의 핵심 윤리다. 사랑은 혼자의 감정이 아니라 함께 닿으려는 방향성이며, 닿지 못한 채 고여 있는 기다림은 생명으로 전환되지 못한다. 여기서 꽃과 풀잎은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는 존재’로 확장된다.

"너는 너이고 / 나는 나이기에 / 애써 외면하는 것"이라는 대목은 관계의 실패를 운명이나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냉정한 통찰로 제시된다. 이 절제된 인식 덕분에 시는 감상에 빠지지 않고, 상처를 성찰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후반부에서 다시 등장하는 비바람은 처음의 바람과 응답한다. 쓰러질 만큼의 갈증 속에서 불어온 비바람을 또다시 "달게 마신" 뒤, 화자는 마침내 꽃이 된다.

이때 꽃은 더 이상 외부의 명명("내게 꽃이래요")이 아니라, 자기 인식으로 도달한 존재의 형상이다. 노랗고 붉은 꽃잎이 "하염없이 피었다 시드는" 장면은, 고통을 통과한 이후에도 삶이 여전히 반복과 소멸의 리듬 위에 있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마지막 연의 "외나무 다리"와 "툭 / 떨어지던 날"은 생의 결정적 균열을 암시한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는 “지지 않는 / 당신의 향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응으로 남고자 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꽃이 지는 대신 향기가 되는 결말은, 이 시가 상처를 비극이 아닌 존재 방식의 전환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처'는 고통을 견뎌낸 서정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해 존재의 형식을 바꾸는 시다. 그래서 이 시에서 상처는 끝내 꽃이 되고, 꽃은 다시 향기가 된다. 사랑이 닿지 못한 자리에서도, 시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피지 못한 삶조차도, 향기로 남을 수 있다고.


■ 최대남 시인

최대남 시인은 삶의 상처와 사랑의 진실을 응시하는 서정으로 꾸준히 독자를 만나온 시인으로, 시를 쓰고 읽는 일에 머물지 않고, 낭송과 교육, 공공의 현장으로 확장해 온 문학인이다.

시집 <아내의 일기>, <사랑아 너 내게 오려거든>,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를 통해 사랑과 믿음, 관계의 상처를 진솔한 언어로 탐색해 왔다.

4·19혁명 국민문화전야제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 추모시를 낭독하며, 시로써 시대의 기억과 공동체의 아픔을 되새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또한 '최대남 시낭송 콘서트'를 90여 회 이상 진행하며 시를 공연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했고,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서울시 문화재단이 주최한 동호회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강북문화대학에서 시낭송 공연예술과 시조 및 시창작을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제1회 신경림 시인 추모 시낭송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아 시낭송 문화의 깊이와 품격을 세우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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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섭 기자 i2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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